- 기억의 무게에 눌리지 않고 추억이라는 감상에도 빠지지 않고 -
읽어보라고 추천해주시는 분이 있어 이 책을 읽게 됐습니다.
솔직히 겉표지가 좀 따분해 보여(그림이야 아주 멋지지만, 이런 풍의 그림이 있는 책은 내용이 지루할 것이라는 제 선입견때문에......) 별로 기대를 하지 않고 시큰둥하니 읽기 시작했지요. 추천해주신 분의 말씀이 아니었다면 쉽사리 손에 들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웬걸? 거짓말 좀 보태 얘기하면 숨 한번 안 쉬고 내리닫이로 앉은 자리에서 1, 2권을 금세 다 읽어버렸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읽어보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책 속의 이야기 하나하나가 다 재미있어 저도 모르게 정신없이 빠져들어 읽게 되고 마는, 그야말로 ‘소설읽기의 기본 즐거움’을 맛보게 해준 책이었습니다. 이런 즐거움은 환타지나 논픽션 또는 생활동화나 의인화 동화를 읽을 때하고는 다른 것이지요. 엄마나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 시절 이야기를 숨죽이며 귀 기울여 들을 때와 같은 즐거움이라고나 할까요.
순식간에 다 읽고나서 그래도 아쉬움이 남아 이번엔 차근차근 천천히 책장을 넘기며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아, 이제 다시 보니 하나의 장편소설인 줄만 알았던 이 책은 한 편 한편 구성이 잘 짜여진 단편소설 모음이란 생각도 듭니다. 그만큼 한 이야기, 한 이야기가 독립적으로도 아름답습니다. 각 장마다 하나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통일되어 잘 짜여진 구조라니.......
제 어렸을 적 이야기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어디 제 어린 시절 이야기뿐이겠습니까. 고단한 세월을 인내로 버텨온 우리 시어머님 인생도 이렇게 한번 써보고 싶어지네요. 아, 우리 고모님 이야기도 있었네. 외삼촌도 아버지도 막내이모이야기도........ 이렇게 소재가 무궁무진할 수가!
우선 생각나는 대로 제 어릴 적 이야기부터 써보려 하니 처음부터 막히는군요. ‘내가 겪은 일을 쓰는 건데’ 하고 만만하게 생각했는데 이게 장난이 아니군요.
첫째, 쓸 게 너무 많아요. 기억은 하루 종일 넘쳐나는데 무얼 버리고 어떤 것만을 잡아야 할지요.
둘째, 그럴 듯한 이야기 하나를 잡아놓긴 했지만 내 기억은 소설처럼 단순(?)하지 않고 수많은 곁가지들은 동반하고 있어 어디까지를 쳐내야만 오롯한 이야기로 설 수 있을지 난감합니다. 이럴 때 기억이란 놈은 오히려 ‘쓰기’의 방해꾼일 뿐입니다.
저자는 책 말미에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묻지 말기 바란다.”고 야무지게도 덧붙여 놓았네요. 이 말이 ‘옛 기억 더듬어 쓰기’의 핵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자는 분명히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쓴 게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해, 게다가 분명히 기억을 변형까지 했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얄밉도록 그 과정을 잘 밟은 저자의 능력이 새삼 돋보이는군요.
저도 이 작가처럼 제 기억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추억이라는 감상에도 빠지지 않고 기괴한 변형을 꾀하지 않아 다들 감쪽같이 사실인 줄 알게 만드는 ‘쓰기’ 작업을 할 수 있을까요? 으음....... 참으로 쉽지 않아 보이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