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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받는 자들에게 우월한 덕성을 부여하는 시기는 일시적이고 불안정하다. 이는 억압자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낄 때에만 시작되며, 그들이 가진 권력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을 때에만 일어난다. 피해자를 이상화하는 것은 일시적으로는 유용하다. 덕성이 가장 큰 선이고, 복종이 덕을 만든다면 권력을 거부하는 것은 친절한 행위이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면 부자들이 자신의 재산을 지키고 가난한 형제들을 위해 영생을 양보하는 것은 고귀한 행위이다. 여성들을 더러운 정치에서 배제하는 것은 남성들의 훌륭한 자기희생이다. 이 밖에도 많은 경우가 있다. 그러나 억압받는 계급은 조만간 자신들의 우월한 덕성이 권력을 가져야 하는 이유라고 주장할 것이고, 억압자들은 자신들의 무기가 거꾸로 자신들을 겨누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권력이 평등해지면 우월한 덕성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헛소리였고 평등을 요구하는 근거로 불필요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된다.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찬양은 댐, 발전소, 비행기에 대한 찬양과 마찬가지로 기계 문명 시대의 이데올로기 중 하나이다.
충분한 영양, 깨끗한 공기, 적절한 교육과 주거 환경, 적당한 휴식이 아니라 충분치 못한 영양, 불충분한 교육, 햇빛 부족과 더러운 공기, 불결한 주거 환경, 과로가 더 나은 사람을 만든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경제 재건을 시도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며, 오히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덕성을 쌓는 데 유리한 조건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명백한 논리에도 많은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 지식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다른 계급보다 더 애정을 가지는 척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낀다. 그리고 동시에 오직 선량한 인간을 길러내는 데 필요하다고 자신들이 주장한 조건을 없애겠노라고 공언한다. 워즈워스는 어린이들을 이상화했고, 마르크스는 탈이상화했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워즈워스였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프로이트는 아직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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