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달리지 않아도 좋다
ProcessPerson 2003/09/06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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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까지만 해도 내게 달리기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운동과 담을 쌓고 산데다 중고교시절 오래 달리기조차 한 번도 완주해본 적이 없는 내가 달리기라니...하지만 지금은 10km 대회를 완주한 경험이 있고 하프 마라톤을 뛰어보려고 계획하고 있다. 아직도 나는 1시간을 지속적으로 달리는 것이 힘들고 때로는 뛰는 시간보다 걷는 시간이 더 많다. 그래도 나는 주제넘게 스스로를 '러너'라고 생각한다.
'천천히 달려라'는 문지방을 넘기가 망설여지는 순간부터 결승점을 통과하기까지 내가 달리면서 겪었던 모든 감정의 굴곡과 의식의 흐름을 내가 자각하는 것보다 더 깊고 세밀하게,게다가 유머러스하게 묘사해준 것 같은 책이었다. 꼭 달리기를 해본 사람이어야만 이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달리기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삶이 실패의 잔재들로 이뤄진 것 같은 절망감에 빠져본 사람들,'안된다'와 '해야 한다'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사람들이라면,나처럼 이 책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인생을 길에 은유한다면,그 길을 달리는 태도를 성찰한 이 책은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를 쉬운 문체로 사유한 인문학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의 말대로 매번의 달리기가 늘 기쁘지 않다. 우연히 달리기를 시작한 뒤 나는 더 나아지지 않는 것에 노심초사했다. 늘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며 인내심이 약한 스스로를 나무랐다. 변화에 대한 저항은 지금도 끈질기게 나를 유혹한다. 그러나 '자신의 최상이면 된다'는 저자의 글을 반복해 읽으며,나는 내가 겪은 경험들을 돌이켜 생각해볼 기회를 갖게 됐다.
같은 코스를 같은 속도로 달려도 모든 달리기는 다 다르다.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매번의 달리기는 좌절과 권태,절정과 기쁨의 순간을 고스란히 체험하게 한다. 그 어떤 체험도 영속되지 않으며, 내가 밟지 않은 앞길에는 지금보다 덜하지 않은 선물 혹은 함정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저자는 '당신의 최악이 당신의 최상과 마찬가지로 순간에 불과하며 당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을 해방시켜줄 행위'라고 말한다. 요는 '과정의 인간'으로 사는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기쁨은 달리는 행위에 있고,목적지가 아니라 여정에' 있다.
올 봄 10km 대회를 완주했을 때가 내 딴에는 인생의 가장 힘든 고비를 넘고 있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처음엔 초조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의식 속에는 온전히 달리는 행위만 남게됐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에고와 집착을 버리고 공허와 터무니없는 기쁨, 더 큰 힘과의 조화속으로 내달렸다. 그 순간을 다시 체험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계속 달리는 일 밖에 없을 것이다.
'가장 힘들다'고 느꼈던 그 때보다 나는 지금이 더 힘겹다. 앞으로도 계속 '가장 힘든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자신의 최상이 되라'는 저자의 말을 기억하려고 한다. 내가 통과한 결승선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기억한다면,'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한 뒤 그래도 나아지지 못하는 것들과 화해하는 법','나의 과거와 맞서 거둔 사소한 승리를 자축하는 법','뒤뚱거리며'나아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물론이고, 매끄러운 번역으로 귀한 책을 만나게 해준 역자에게도 감사한다. 자신의 선택을 담담히 들려준 역자 후기를 읽으며, 이 책을 통해 인생을 들여다보는 기회를 가졌던 또 한 사람을 만난 것 같아 가슴이 뭉클해졌다.
안타까운 것은 책 겉장 디자인의 조악함이다. 말줄임표를 넣어 늘어지는 느낌을 주는 제목 디자인과 난삽한 겉장만 보고서는 선뜻 이 책을 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저자가 누차 강조했듯 '달리기는 속도나 기록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일'이고 '자신을 받아들이는 길'임을 말하는 책의 표지에 왜 목각인형이 달리는 그림을 넣었을까? 이해가 되질 않는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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