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동서양의 구분을 도식적으로 하는 경향이 있는데, 편리한 만큼 위험한 방법이다. 가령 서양은 이성 중심이지만 동양은 감성 중심이라는 둥, 서양 사람은 자연을 극복과 지배의 대상으로 봤다면 동양 사람은 공존 혹은 순종의 대상으로 봤다는 둥. 주류와 경향이야 있을 것이지만 그게 다일 리도 없는 노릇. 주변 상황을 자의적으로 배제하고 이해하는 것은 오해와 착각의 지름길이다.
상징적인 장면이 떠오른다. 대학교 때 만난 두 중년 여교수는 각각 동양철학(유교를 배웠다)과 서양철학(중세철학이었던 것 같다)을 담당했다(전자를 A, 후자를 B라 하자). 내 선입견이 작용한 결과이겠지만 A는 인자해 보였고, B는 날카로운 지성의 소유자로 보였다. 편견은 얼마 못가 깨졌다. A가 수업 중 결혼에 대해 한 말 때문이다. "결혼해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는 것은 인륜이고 천륜이다." 유교 입장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그때 A는 뭔가 비장하면서도 비정했다. 나는 '비혼'인 B를 떠올리며 질문했다. "그렇다면 학문을 위해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은 인륜을 저버린 것인가." 단호한 답변. "그렇다." A는 결혼을 하지 않으면 남자든 여자든 사람 구실을 잘 못한다고도 말했다. 나는 그 학문이 인륜을 중시하는 유교 철학이어도 그러하냐고 물어봤다. A는 동양 철학은 조금 다를 수 있다고 말했다. 서양 철학에 비해 동양 철학은 공부를 하는 것만으로도 인격 수양에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그도 나처럼 B를 떠올렸던 걸까. 어쨌든 그때 나는 인격 수양은 B보다 A에게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신영복 선생의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돌베개, 2004.)을 읽기 전에도 약간 걱정했다. 흔히들 말하는 '동양의 가치'를, 그것도 '고전'을 통해 다시금 듣는 일은 얼마나 하품나는 일인가. 익숙함은 악이다. 아무런 새로운 자극이 없음은 생각과 몸이 썩어간다는 것을 뜻한다. 선생의 높은 이름은 익히 들어왔지만, 그래서 더 불안했다. 시간 낭비하는 것은 아닐까.
기우였다. 선생의 '강의'는 신선했다. 익숙했던 텍스트도 다시 읽혔다. 그의 관점 덕분이다. 선생은 서양 사상의 경향을 존재론적으로 동양 사상의 경향을 관계론적으로 파악한다. 모두에 언급했듯 이런 이분법은 위험하다. 그러나 대가는 대가이다. 선생은 그런 이분법에 함몰되지 않고 오히려 고전을 끌어와 쓴다. 그러니까, 선생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관계론이지 동양 고전이 그대로 관계론인 것은 아니다. 얼마든지 '다르게' 읽어도 된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다음에는 무엇을 읽고 보든 관계론적인 측면에서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이 책의 부제는 '나의 동양고전 독법'이다. 중요한 것은 '동양'도 '고전'도, 심지어 '나'(신영복)도 아니다. 결국 방점은 '독법'에 찍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