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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기록
  •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무선)
  • 페터 한트케
  • 10,800원 (10%600)
  • 2011-02-25
  • : 3,981


 독일 소설 주인공들은 약간 특징이 있다. 행동하기 보다는, 사소한 행동을 속으로 관찰하고 고찰하고 사색하기를 좋아한다. 로베르트 발저의 작품이나 게나치노의 '이날을 위한 우산'의 주인공이 좋은 예다. 페터 한트케의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의 주인공도 이런 부류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침울하고 철학적이고 한없이 진지한.


  하지만 이 작품 속 '나'에는 한트케만의 특징이 담겨 있다. 그는 로베르트 발저의 어린애같은 즐거움이나 게나치노의 수줍음 없이, 더 자폐적이고 의문에 차 있는 주인공이다. 묵묵히 고뇌하며 그 답을 찾으려 하지만 계속해서 실패하고 또 실패한다.


 책은 아내 유디트가 남긴 짧은 편지에서 시작한다. 오래 싸우고 증오했지만 이렇게 편지 한 장 남기고 떠난 것에 놀란 '나'는 그녀를 찾아 오스트리아에서 미국으로 떠난다. 그는 그렇게 (지금까지의) 인생의 반쪽을 되찾기 위한 여행을 시작한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는 분명 여행을 통해 주인공의 자아가 변화하는 성장 소설이다. 내게 독특하게 다가왔던 건 우리의 주인공 '나'가 그렇게 어리지 않다는 것(이제 서른 살이다), 이미 결혼했고 직업도 있고, 인생의 성숙기에 도달한 인물같았다는 점이다. 익숙한 성장소설의 도식을 따르기엔, (스승을 만나고, 연인을 만나고, 가족과 헤어지고, 대학생이 되는 둥) 인생의 초창기의 단계를 이미 다 거치고 난 인물처럼 지쳐 보인다. 이런 '나'가 어떻게 성장하게 될까?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라니. 그는(우리는) 누구와 긴 이별을 하게 되는걸까?

 어린아이가 아니어도 성장할 수 있을까? 변화할 수 있을까? 이혼도 결혼도 다 말쑥한 어른들의 일 같아서 성장이란 코멘트를 달기에는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 

 억누르고, 번민하고, 투덜거리는 듯이 계속 고민하는 주인공이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게 그는 소설 주인공이 지닐 법한 매력이 없었다. 만약 어느 파티에서 그를 보았다면 나는 참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늘진 얼굴로 진지하게 혼잣말을 하는 사람을 첫눈에 보자마자 반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사람은 첫인상만으로 판별해서는 안 되고, 소설은 끝까지 읽어봐야 하는 법. 나는 어느새 유디트와 주인공이 서로 권총을 가지고 멜랑콜리한 기싸움을 하는 장면까지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존 포드와 유디트의 마지막 문장을 눈에 담고 책을 덮는 순간, 이 작품이 내게 긴 여운으로 남을 것이란 걸 깨달았다. 가슴에 서늘하고 맑은 바람이 불었다. 이 소설이 여느 성장 소설과 달라서 다행이었고 감사했다.


 나는 처음에 주인공의 독백이 유난스러워 보였고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하고 자기 행동을 반추하고 타인을 관찰하고 분류하는 걸까?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그런 노력이 주인공이 세계 속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확실히 알고자, 타협하지 않는 진지한 삶의 태도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미국에서 그의 지난 애인 클레어와 그녀의 딸 베네딕틴과 함께 여행한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도 어떤 강요나 부담 없이 함께하는 두 인물과 있으면서 주인공은 조금씩 변화한다. 나는 트럭을 타고 미국을 가로지르며 그가 느꼈던 감정이 참 소중하고 독특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클레어와 과거의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토론한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태도로 살아가고, 어릴 때는 이러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주인공은 자신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고 계속 과거와 자신을 비교한다. <녹색의 하인리히>는 어떤 인물인지, 자신은 누군지. 그는 넌지시 말한다.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어쩐지 내가 변화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주인공의 끝없는 자기 성찰이 찾아낸 이 말은 감탄스럽다. 그의 성장은, 자아의 변화는 외부의 사건 때문에 벌어지지 않는다. 그는 성장을 겪거나, 맞닥뜨리는 인물이 아니다. 그의 성장은 탈피처럼, 시간의 흐름에 맞추어 천천히 일어나는 과정이다. 계속해서 타인과, 자신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고심하고 관찰한 결과, 그는 서른 살에 변화의 한 가운데 있음을 깨닫고 묘한 감회에 젖은 것이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책을 통해(<녹색의 하인리히>)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알고자 했으나, 그 노력은 만족스러운 대가를 얻지 못했고, 아내와는 끝없이 다퉜으며 결국 그녀는 떠났다. 

 그녀를 찾아야 하는 건, 사라진 그 여인이 자기 자아의 타자. 반쪽이기 때문이다. 애증하는 그녀 없이 그는 고독하고 홀로 선 존재일 뿐이다. 

 주인공은 클레어에게 계속 어린 아이였을 때 그가 무엇을 느꼈는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나는 배불뚝이가 되고 싶어' '나는 어서 빨리 늙고 싶어') 털어놓는다. 자신이 허물을 벗고 변화하는 중이라는 것에 당황스럽지만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 듯 묵묵하게. 


 그는 유럽과 미국이 어떻게 다르고, 자신과 어린 시절 자신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침착하게 숙고한다. 나는 그가 누구의 지도나, 가르침 없이 스스로 변화한다는 게 참 좋고 자랑스럽다. 그는 자신의 변화가 신기하고 흥미롭지만 길을 잃거나, 두려워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여행한다. 트럭을 운전하고 종종 도로변에 멈춰서서 풍경을 관찰한다. 

 그의 깨달음이 실측백나무를 통해 이뤄진다는 것도 신선하다. 그는 성장을 통해 사회 속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다. 대신 나무와의 교감을 통해, 어린 시절과의 이별을 통해 고독한 한 인간으로서 세계에 존재하는 법을 터득한 것이다.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고 내면의 고뇌와 끊임없는 번민을 통해. 그토록 죽일 듯 싸웠던 유디트와 재회하게 되었을 때 더 이상 그녀는 그를 휘두를 수 없다. 그녀의 권총은 겁을 줄 수 없다. 죽음은 그를 두렵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래 번민하고, 답을 찾아 책과 내면을 탐구했던 그의 노력은 예상치 못한 여행을 통해 마침내 끝을 본다. 유디트는 그를 죽이지 않고, 둘은 함께 존 포드에게 간다. 둘의 기나긴 번민의 움직임들. 주인공이 변화를 받아들이고 나서 만나는 아내의 모습은 어쩐지 환상같다. 그가 오래 매달려 있었고, 이제는 보내주기로 결심한 과거의 자아같이 느껴진다.


 주인공은 성장하고, 자아는 한층 성숙하여 좀 더 평화로워 진다. 그는 아내와 헤어질 테고 여전히 고독하지만 공허하지 않게 삶을 살아갈 테지. 책을 덮으면서 나는 주인공에게 감명을 받았다. 탈피는 조용히 혼자서 껍질을 벗겨내는 괴로움 속에 이뤄지는 것. 그의 절제된 문장과 무심해 보이는 대사들 사이에서 나는 그 통증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주인공이 못마땅했지만 1부가 끝날 무렵 나는 평생 그를 잊을 수 없을만큼 아름다운 문단을 발견했다. 


 '나는 클레어에게 옆방으로 건너가서 아이를 좀 살펴봐야 하지 않곘느냐고 했다. “베네딕틴이 혼자 있다고 생각하니 그애가 지독히 외로울 것 같아.” 내가 말했다. “우리 둘만 여기 함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아이 곁에 아무도 없다는 생각을 하니까 저 건너편의 그 미성숙한 존재가 고통스러울 만큼 따분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 뼈저리게 느껴져. 지금 당장 아이를 깨워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 따분함을 쫓아버려야 할 것 같아. 아이가 지금 따분한 잠과 꿈속에서 얼마나 고통을 받고 있는지 느껴져서 하는 소리야. 아이 곁에 같이 누워 위로의 말을 해주며 아이가 그 기나긴 외로움을 잊게 만들어주고 싶어. 사람이 태어나는 순간 그 즉시 의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어. 그러니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구원한다는 내용의 옛날이야기들을 들으면 곧바로 수긍할 수 있어.” 나는 클레어에게 필라델피아에서 만난 군인 이야기를 꺼내면서 그가 얼마나 구원되기를 바랐는지 들려주었다. p 107-108


 위로의 말. 변화는 피할 수 없고, 괴로움은 길고 긴 밤으로 계속된다. 결국 그는 지난 날과 기나긴 이별을 이루어 내지만, 밤이 되면 어둠 속에서 혼자 떨 영혼과 함께 하고 싶다는 순수한 소망을 드러내는 이 주인공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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