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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기록
  • 창백한 불꽃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 14,400원 (10%800)
  • 2019-02-28
  • : 4,176


독서가 본래 훌륭한 지적 유희의 방법이라고들 하지만, 나는 책이 이렇게나 어렵기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첫 문장부터 엄청나게 지루하다.


 '999행의 영웅시격 2행 연구聯句로 이루어진 이 시는 총 네 편으로 구성되었으며...' 


책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연구서다. 연구서는 한 가지 주제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목적으로 하니 소설적인 재미를 얻기 힘들다. 

 게다가 독자가 책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저자가 (나보코프가 아닌) 킨보트라고 것과, 존 프랜시스 셰이드라는 훌륭한 시인이 그의 있으며 현재 죽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바람직한 독자는 경건한 마음으로 이 허구의 세계에 빠져들겠지만, 나는 초장부터 투덜댔다. 누가 책을 읽을 때 이렇게 정신없이 앞뒤를 왔다갔다 하게 만드는 거야? 

나중에는 독자의 권리를 남용하면서 대부분의 주석을 무시하고 읽었지만, 이야기가 중반부로 넘어가면 저절로 책의 앞뒤를 넘나들게 된다. '창백한 불꽃'에 완전히 몰입하기 위해서는 일단 책을 절반 정도 읽는 게 필요하다. 여기까지 읽어놓고 그만두면 아까운데..싶을 때부터 가닥이 잡히고 페이지가 훌훌 넘어간다.

 책이 재미없다는 건 아니다. 그저 쉽게 읽히지 않을 뿐이다. 읽기로 결심한 사람은 활자로 이루어진 게임의 참가자다. 또는 정교한 공예품을 선물로 받은 어린애일 수도 있고.


 저자는 킨보트, 주인공은 시인 셰이드이다. 그는 죽었다. 시인의 작품은 저자에게 있고 그는 이 시의 의미를  설명하고자 한다. 저자가 권장하는 독해는 세 번에 걸쳐 각기 다르게 읽는 것이지만 나는 단 한번 내 뇌 속에서 타오른 옅은 불꽃을 기록하는 데 만족하겠다. 애초에 킨보트의 말은 믿을만한 게 못 된다.


 우리의 시인이 진작에 죽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머릿말에서 저자는 자신한테 가해질 비난을 세세히 적어놓음으로서 마음 놓고 그의 이야기에 귀 귀울이려던 독자에게 경계시킨다. 사람들은 나를 믿지 않겠지만, 나는 내 얘기를 하려오.

 나보코프의 책의 특징이다. 다른 누구보다도 서술자를 제일 믿을 수 없다. 하지만 책을 읽어야 하는 우리는 일단 그의 이야기를 받아들여야 한다. 화자와 청자 사이의 견고한 위계를 (우리는 그를 멈출 수도, 중간에 끼어들 수도, 반박할 수도 없다.) 정교하게 사용하는 나보코프의 능력은 얄밉지만 감탄스럽다.


 믿을 수 없는 화자인 킨보트와, 불행히도 이웃을 잘못 만난 탓에 박제품이 된 시인 존 셰이드, 아마 제일 정확한 진실을 알고 있을 테지만 그덕에 색인에서 가장 작은 분량을 얻을 수 밖에 없는 시빌 셰이드 말고도 주요 인물은 하나 더 있다. 그라두스다.


 내게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입체적이고 활자를 넘나드는 그의 모습이 눈에 선히 보일만큼 아름다운 문장은 바로 그라두스를 묘사한 것이다. 


 '우리는 아득히 먼 젬플라를 떠나 푸른 애팔래치아까지 나아가는 그라두스를 끊임없이 염두에 두면서 이 시 전편을 통해 따라갈 것이다. 그는 시의 리듬이 만드는 길을 따라 어떤 각운은 타고 지나가고, 휴지 없이 다음 행으로 이어지는 시행의 끝부분에서는 미끄러지듯 돌아가고, 행간의 휴지부에서는 함께 숨을 고르고,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가듯 한 행 한 행 타고 내려가다 하단에서는 풀쩍 뛰어내린다. (''') 단어 사이에 숨기도 하고, 새로운 편이 시작되는 지평선에 다시 나타나 약강격 율동으로 일정하게 행진해 다가와 길을 건너고, 여행가방을 든 채 5보격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로 이동하다 뛰어내려 새로운 생각의 열차를 타고, 호텔 로비로 들어가 셰이드가 단어 하나를 지우는 동안 침대 등을 끄고, 시인이 그날 밤의 작업을 마치고 펜을 내려놓으면 잠든다.'


 이 매혹적인 묘사가 꼭 누구를 암시하는 것 같지 않은가. 작가의 펜을 따라 움직이고 정지하는 존재, 그라두스는 사심없이 책에 빠져든 독자에 대한 은유다.


 그라두스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킨보트는 그를 조롱하기를 (그의 하층 계급적 면모와 부족한 지성같은 것) 서슴치 않고, 그의 여정은 실패와 허탕으로 이루어진다. 젬블라의 폐위된 왕을 충실히 좇는 인물은 그 뿐이다. 셰이드에게 젬블라 이야기는 유흥거리 이상이 되지 못하고 이야기에 등장하는 오돈 등 다른 인물들은 모두 킨보트의 상상 속에서 존재할 뿐이다. 그라두스만이 킨보트의 상상/회상과 현실 사이 경계선을 열심히 넘나든다. 


 우리는 저자를 믿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읽고나면 이 이야기가 상상이라는게 노골적으로 밝혀진다.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듯 실제 일어날 일을 가늠하는 저자의 태도가 괘씸하지만, 그로서는 학자의 마지막 도의를 지킨 것일지도 모른다. 셰이드의 걸작에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 젬블라 이야기는 아마 모두 환상일 것이다. 그건 저자인 킨보트의 삶에서 구현해낸 것일테지만 (그에게 자신의 동성애 욕망을 숨긴채 결혼한 아내가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진실이 아니다. 셰이드의 죽음과 그의 삶은 아무런 관계가 없고, 셰이드의 시와 그의 관계도 아주 미미할 것이다.

 하지만, 이 냉혹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책은 글자 하나하나가 반짝거린다. 우리는 이 작품이 미치광이의 궤변일 뿐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 그건 왜일까? 나보코프의 작품 전반에 통용되는 이 언짢으면서도 도저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힘. 그건 도덕도, 윤리도 모든 통속을 벗어나 자기 얘기를 풀어놓는 문장의 아름다움에 있다. 킨보트의 젬블라는 아름답다. 넓은 들에 햇빛이 따스하게 내려앉고 나뭇잎은 바람에 흔들거린다. 이런 풍경의 묘사 앞에서, 우리는 그 말을 믿고 안 믿고 할 틈이 없다. 순식간에 빠져들고 만다. 우리의 상상은 젬블라의 형태를 만들고, 약간은 퀴퀴한 냄새가 날 법한 성을 짓는다. 러시아어에서 한국어로 번역된 이 문장들이 독자를 마취시킨다. 서사의 인과 관계에 (과연 왜 여기서 젬블라가 뜬금없이 등장해야 하는가) 대한 고민은 저편으로 사라지고 폐왕의 모험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가 더 궁금하다.

 마지막까지 감질맛 나게 뜸들이는 두 가지는, 도대체 젬블라의 왕이 누구인가와 셰이드의 죽음에 관한 것이다. 이 두 비밀은 책을 계속 읽게 하는 동력이다. 딱히 숨기는 건 이나다. 젬블라의 왕은 저자고, 셰이드는 운 나쁜 이웃을 만남으로서 그라두스의 총에 죽는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독자는 킨보트가 젬블라의 왕이라고 생각한다. 폐위되어 간신히 도망친 채 학자로 살아가는 인물. 하지만 책의 수미상관은 냉정하다. 머릿말에서 그가 자신에게 가해질 비난을 미리 말한 것처럼, 끝에서도 그가 자기 서술의 허점을 인정함으로서 이야기는 사실로서 힘을 잃는다. 이건 모두 허구다. 판타지고, 한 인물 머릿속의 병적인 상상이다. 이렇게 김빠지는 일이 있을수가. 내가 열심히 그의 모험을 따라다녔던 건, 그의 터널을 함께 지나고, 그의 산 속을 함께 걸었던 건 전부 물거품이란 말인가?


 감히 농락당했다는 기분보다도 허탈감이 크다. 나를 놀린 건 그렇다치고, 젬블라는? 가여운 왕비 디사와 오돈은 어떻게 되었지? 이쯤 되면 우리는 이미 저자의 허술함에 익숙해져있다. 아쉬운 건 훌륭하게, 시인 셰이드의 구절에 맞추어 흘러가던 이야기가 급작스런 끝을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 일련의 판타지다. 없는 나라를 만들어 내고, 스스로가 그 제국의 왕이다. 하지만 터무니없지도 않고, 밉지도 않다. 그건 왜일까? 아까 말했듯이 아름다워서? 없는 허구의 나라가 풍경이 아름다워 무엇하나. 하지만 우리는 공감한다. 킨보트의 행태가 진실을 훼손한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정교한 장치를 분석하고, 되짚어 보고 위대함을 발견해내려 애쓴다. 왜 그러는가. 나보코프는 분명 기만을 즐긴다. 현실을 제쳐두고 미美와 비유와 품격을 애호한다. 이 재수 없는 (나는 이 말을 안 할 수 없다. 그의 귀족적인 성품은 꽤 밥맛이다.) 작가가 있어 가슴이 벅차오르는 건 왜일까.

 그건 예술에 복종하는 그의 거룩한 헌신 때문이다.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이건, 흠모하는 사람이건 그게 삶의 전부가 될 수 없다는 걸 마음 한구석에서 알고 있다. 인생은 그보다 지루하고 실망스럽다. 언제나 햇빛이 찬란하게 나비의 날개를 비추지는 않는다. 나비의 시체는 죽은 벌레 중 하나일 뿐이다. 

 글쓴이는 젬블라의 왕을 상상할 수는 있어도 왕이 될 수는 없다. 이 유한성과 무력함.

  적어도 킨보트는, 우리의 성실한 작가는 진실했다. 그는 예술의 신하였을지 모르나 노예는 아니었다. 마지막 몇 장에서 그가 밝히는 자기 작품의 결점은 이 이야기를 현실의 법칙에 (그라두스가 판사를 찾아온 정신병자였다면 그의 말은 거짓이다. 누구도 학교에서 보트킨/킨보트 교수를 찾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의 말은 거짓이다.) 포섭한다. 

 예술은 거짓이다. 가슴 아프게도. 정말로 아름다운 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그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세상의 무의미를 견딜 수 없어서. 이런 시도는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무책임한 행동일 뿐일까?


 내가 킨보트를 옹호할 수 있는 건 그가 결국에는 솔직했다는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 그는 자신에게 가해질 비난을 주저 없이 털어 놓는다. 사실 그라두스는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사람일 뿐이고, 학교에서 누구도 킨보트 교수를 찾은 적이 없으며, 시빌 셰이드는 그를 남편에게 빈대붙은 미치광이라 할 것이다. 우리는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다. 그가 털어놓았기에.(아! 전부 거짓이었군) 킨보트는 그래도 상관하지 않는다. 비난을 막을 수 없지만 (아마도 그게 사실일 터이므로) 그런 것과 자신의 이야기는 별개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우리는 터널이 문 하나 하나를 열어보듯 책을 앞뒤로 살펴보고 숨겨진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를 한다. 삶이 무언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에게 예술이란 절망적으로 아름다운 환영이다. 우리는 그 풍경을 누릴 자격이 있지만, 만든 사람은 허구를 지어낸 대가를 치뤄야 한다. 신뢰를 잃은 그는 대신 무얼 얻었는가? 


 나는 그라두스가 사심없는 독자에 대한 은유라고 말했다. 그는 되돌아 보지 않는다. 세이드의 펜 끝에 매달린 그는 젬블라 왕의 존재를 의심하지도 않고 계속 따라갈 뿐이다. 결국 고달픈 여정 끝에 그는 총알의 방아쇠를 당기지만, 아아 실패해버렸다. 그는 제일 훌륭한 완결, 킨보트의 목숨을 끊는 데 실패했다. 그렇기에 저자는 주머니에 담긴 원고로 '삶에 대한' 그럴 듯한 '주석'을 만들어내야 하는 임무에 처했고 한 권의 책이 나왔다. 

 작가와의 게임에 기권한 독자라면 (나는 진작에 기권했다. 성실하게 두통을 앓느니 불성실하게 속는게 좋다.) 대게 그라두스의 운명을 맞는다. 하지만 우리는 저자에게 배신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오히려 연민을 느낀다. 온전한 현실도 허구도 아닌 어중간한 장소가 우리의 세계다.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 삶이란 물리 법칙보다 더 묘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서. 

 그는 독자를 기만하지 않는다. 그냥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다. 누군가는 나를 미쳤다고 말할 테지만 내 이야기는 이렇소. 그는 제멋대로일망정 무책임하지는 않다. 


 우리는 그의 시빌 셰이드가 될 수도, 비판적인 교수진이 될 수도 있지만 나는 그의 그라두스가 되고 싶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의 목소리를 의심 없이 좇다 결국 함께 몰락을 맞이하는. 우리는 그를 이해할 수 있을까? 모든 걸 지어낸 믿을 수 없는 저자 킨보트를? 나는 이해할 수 있다. 살아가기 위해 꾸며내야 하고, 허구의 아름다움을 상상해야 하는 이유를. 나보코프의 주인공들은 다들 대책없이 예술을 옹호한다. 도덕과 윤리의 뒤에서. 우리가 킨보트를 우상으로 보는가? 아니다. 험버트를 우상으로 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이 낭만적인 미치광이들이 인간 삶의 무시할 수 없는 면모을 지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훌륭한 그라두스였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는 이미 셰이드를 죽여버렸으므로 기회는 날아가 버렸다. 오직 다음, 더 아름답게 타오를 다음만을 기대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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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계속 살아갈 것이다. 다른 변장과 다른 외관으로 꾸밀지 모르지만,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 나는 많은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역사가 허락한다면, 되찾은 나의 왕국으로 배를 타고 귀환해 큰 소리로 흐느끼며 회색빛 해안선과 빗물에 어슴푸레 빛나는 지붕을 반길지도 모른다. 정신병원에서 몸을 움츠리고 신음하게 될지도 모르고.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나고 어디에서 그 장면이 펼쳐지든, 누군가가 어디선가 조용히 출발할 것이다-아니, 누군가는 이미 출발했고, 아직은 좀 멀리 떨어진 곳에서 표를 사고, 버스 배 비행기에 오르고, 착륙하고, 백만 명의 사진사를 향해 걸어가고, 결국 내 초인종을 울릴 것이다-더 크고, 더 훌륭하고, 더 유능한 그라두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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