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torry님의 서재
  • 창백한 불꽃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 14,400원 (10%800)
  • 2019-02-28
  • : 3,963

롤리타를 읽었을 때 받았던 충격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나보코프의 천재성은 롤리타만을 보고도 이미 확인했건만, 지금 나는 또 한 번 가격당한 기분에 혼돈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가 언어뿐만 아니라 트릭에 있어서도 얼마나 센스 있게 구사하는 작가였는지, 첫장을 펼쳤을 때 단단히 준비하고 있었음에도 나는 또 다시 당하고 말았다.

 

첫 번째 트릭은 이름이었다. 정말이지 어이없게도 험버트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던 탓에 저 ‘킨보트’라는 이름이 주는 음율성을 지레 추측하며 멋대로 넘겨짚었다. 그래서 머리말에서 그의 이름을 인지한 순간부터 제2의 험버트로써 뻔뻔한 인물의 어디쯤일 거라고 방심했던 것 같다. 그러나 셰이드가 죽은 순간에도 ‘시’는 무사하다며, 시빌에게서 ‘시’의 출간권을 받아내는 킨보트는 뻔뻔스럽다 못해 파렴치하기까지 하니까, 아주 빗나간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두 번째 트릭 역시 험버트를 빼다박은 관음증이었다. 험버트가 님펫을 향한 관음증에 젖어있다면, 킨보트는 셰이드의 시에 대해- 정확히는 젬블라이겠지만-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집요함은 험버트에 맞먹는다. 이런 면들을 종합해 볼 때 그들은 이란성 쌍둥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닮았다.

 

또한 젬블라의 언어를 영어로 옮기는 과정에 있어서 발생되는 제약은, 나보코프가 모국어인 러시아어가 아닌 영어를 선택함으로서 작가로서 언어의 사용에 어려움을 느꼈을 부분이 겹쳐져 일정 부분은 나보코프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젬블라와 러시아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에서도 그렇다. 젬블라라는 가상의 배경 자체가 러시아와 떨어뜨려놓을 수 없다.)

 

처음에는 낯선 전개방식 때문에 롤리타보다도 더 수월치 않게 다가왔다. 나보코프는 친절하게도, ‘관례에 따라 주석은 시 다음에 오지만, 주석을 먼저 훑어보고 그 도움을 받아 시를 읽어보길 독자에게 권유하는 바이다.’라고 게임의 팁을 던져준다. 나는 어리둥절한 나머지 이 책의 카테고리를 다시금 확인해야만 했다. 소설이 아니었던 건가, 라고 말이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야기의 구조로 진행되는 방식까지 더해졌다. 젬블라의 왕, 오돈, 그라두스의 이야기와, 앞서 언급한 킨보트의 시를 향한 집착에 대한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설정들. 아마도 이것은 두 개의 축이 되어 클라이막스가 되는 지점에서 접점으로 부딪힐 거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다.

 

“인간의 삶이란 난해한 미완성 시에 붙인 주석 같은 것.”

이 구절을 보면, 그제야 셰이드가 킨보트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의 비밀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글에서만 본다면 셰이드의 혜안일 것이고, 독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작가서로서 나보코프의 치밀함이 드러나는 시행이다.(책을 다 읽은 후, 다시 이 시행을 읽으면 더욱 아리송해지기도 한다. ‘어쩌면’에 뒤따르는 무한한 가정들이랄까. 이 시의 주인이 결말에서 본 대로가 맞는지 의문을 품게 된다.) 셰이드와 킨보트의 관계가 이웃, 그것도 킨보트의 지속적인 일방통행으로 이루어질 따름이어서, 킨보트의 시선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우리는 셰이드를 베일에 가려진 인물처럼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어찌 달가울 수 있었겠는가. 킨보트의 과도한 관심에 대해 셰이드가 보인 초반부의 반응은 희극적이기까지 하다. ‘그의 입에서 활자로 옮기기 곤란한 욕설이 터져나왔고, 손에 들고 있던 색인카드 더미를 탁자 위에 내팽개쳤다. 나중에 그는 이런 신경질적인 격노를 보인 것은 독서용 안경을 잘못 본 탓이라고 했지만, 정말이지 나는 그의 그런 행동에 충격을 받았고……(중략)’

 

킨보트의 괴벽적인 성향을 따라가다 보면 그것과는 별개로 의아하게 여겨지는 부분도 보인다. ‘유령 같은 암살자들이 나를 잡으러 오는 걸까?’ 라든지, ‘골즈워스 성에는 바깥으로 난 문이 많아 잠들기 전에 그 문들과 아래층 창의 덧문들을 아무리 철저히 점검해도 다음날 아침이면 잠기지 않았거나, 빗장이 풀렸거나, 좀 느슨해졌거나, 살짝 열렸거나 해서 비밀스럽거나 수상해 보이는 문이나 창문이 꼭 있었다. (중략) 나는 11111에 전화했고……(중략)’ 등 무언가에 시달리거나 쫓긴다는 느낌에 이 페이지에 플래그를 세워두기도 했었다. 셰이드처럼 천재 시인으로 추앙받는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면서, 왜 그래야만 했을까?

 

그 와중에도 언어 유희가 다시 이어지면서 독자들을 현혹시킨다. 마치 방금 전 킨보트가 보인 과민 반응은 크게 담아둘 필요 없다는 듯이. 역시 나보코프가 아닐 수 없다. ‘“당신 hal……s 는 정말 지독하오. 친구”라고 쓰인 비열한 익명 쪽지를 발견한 다음부터였다. ‘hal……s’는 환각hallucinations’을 의미함이 분명했다.’ (하단의 각주에는 킨보트가 오독한 철자는 입냄새를 의미하는 ‘halitosis’일 듯하다, 라고 서술되어 있다.) 각주에서는 따로 명시하지 않았으나, 다음 단락에서 강렬한 향기로 언급되어지는 헬리오트로프(헬리오트로피움 투르제네비) 역시 언어유희로써 보았기에 더욱 흥미로웠다. 환각hallucinations- 입냄새halitosis- 헬리오트로프.

 

얄궂게도 띠지에 실린 문구 역시 하나의 트릭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시를 읽을 때마다 이 시가 누구의 것인지 그 답이 바뀐다고 했던가. 그래서 그 부분까지 신경쓰다보니 킨보트의 이런 대사들이 예사롭게 다가오지 않았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선 모두 시인입니다, 부인.’ 라든가, 셰이드의 이름을 풀이하는 부분까지 알면 알수록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듯했다. 셰이드의 이름에 얽힌 부가적인 의미를 생각해보면서 시의 첫 행을 되짚어보기도 했다.

 

정말로 킨보트 자신의 시일까. 그렇다면 셰이드는? 아니면 두 사람은 하나의 인격체에서 나뉘어진 것일까, 등등 혼자서 여러 가정을 펼쳐놓았으니 나보코프는 이런 독자들의 모습 또한 계산했을 것 같긴 하다.(어디선가 나보코프의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도 하다.)

 

그러면서 진실에 접근해가는 동안에도 과연, 이라는 의심을 내려놓지는 못한다. ‘사실 젬블라라는 명칭은 러시아어 제믈랴가 변형된 게 아니라 반영의 땅, 득 닮은 사람들의 땅인 젬블러란드에서 유래한 거라고 말해주었다.’ 이보다 더 직접적인 대화를 보면서도 하나의 가능성에는 무게를 싣지 않았다.

“킨보트는 당신 나라 말로 국와 시해자를 의미한다고 내게 말하지 않았나, 찰스?” 나의 친애하는 셰이드가 물었다.

“네, 왕을 파괴하는 자라는 뜻이죠.” 나는 말했다(망명이라는 거울 속에 자신의 정체를 감춘 왕도 어떤 의미에선 그런 자라고 설명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내가 장담하건대, 찰스. 우리 젊은 친구는 자네와 이름이 같은 자네 국왕을 모욕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네.”

“그가 그러고 싶었다 해도 그러지 못했을 겁니다.” 나는 태연히 말해서 모두 농담으로 돌렸다.

 

이 부분을 읽었을 때, 나는 나보코프와의 게임에서 참패했음을 깨달았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기억나는 ‘롤리타’의 해설 부분에서처럼, ‘창백한 불꽃’ 역시도 한번으로 그쳐서는 안 될- 세 번이고, 네 번이고 여러 번 읽어야할 글이라는 점에 흔쾌히 동의하는 바이다. 어쩌면 나는 이 순간에도 즐거운 기대감에 사로잡혀있는지도 모른다. 롤리타를 접하고 나서 충격에, 그 환희에 찬 충격에 빠진 나머지 나보코프의 또 다른 출간작들을 하나씩 모으기 시작했으므로.

 

그래서 얼마 전에는 러시아 문학을 전공한 지인 분께 나보코프에 대해 물어보기도 했었다. 모국어도 아닌 영어로 이 정도의 작품을 구상하는 작가라면 과연 모국어로 쓴 글은 어떨까, 어째서 궁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의외로 들려준 대답은 명확하진 않았지만,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먼 훗날일지라도- 가까운 시일이라면 더 좋겠지만- 러시아어로 쓰여진 그의 글 또한 한국어로 번역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품어본다. (롤리타가 그러하듯 창백한 불꽃 역시 나보코프의 목소리가 잘 들린달까. 잘 쓰여진 작품일수록, 번역 또한 힘들 테고, 번역하신 분들의 노고 또한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시의 가장 첫 번째 행인 ‘나는 죽은 여새의 그림자였다’를 마지막에서 다시 접했을 때, 그의 글을 언어로 접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전율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죽은 여새의 그림자였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