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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ry님의 서재
  • 거지 소녀
  • 앨리스 먼로
  • 13,050원 (10%720)
  • 2019-02-25
  • : 1,919

거지소녀는 각각의 단편이 하나의 큰 줄기로 이루어진 장편이지만, 국내에서 얼마 전에 출간된 ‘소녀들과 여자들의 삶’도 비슷한 형식을 띤다.(‘거지 소녀’에 비해 자전적 성향이 짙은 편으로 사춘기 시절의 성장물에 가깝다.) 여러 작가들의 단편집들 사이에 앨리스 먼로의 이름이 보이면 일부러 그녀의 단편만 골라 읽을 정도로 나의 애정도는 유독 그녀에게만 편중되어 있는데, 그토록 빠져드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곤 한다.

 

그러다 최근, 앨리스 먼로의 인터뷰를 접하면서, 비로소 나는 내가 그토록 좋아하게 된 그녀의 특장점 한 가지와 그녀의 이색적인 부분까지도 발견하게 되었다. 인터뷰에서 그녀는 자신의 결혼담과 이혼담, 그리고 재혼담이 이어지기까지의 이야기들을 놀랄 만치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렇다. 그녀의 글에서만 볼 수 있는 양립되는 감정들에 대한 촘촘하고 풍부한 묘사는 그녀의 삶에서 비롯된 거였다. 거기에 더해 자신만의 서재도 갖추지 못한 채 다이닝룸 한 구석에서 글들을 써내려간다는 그녀의 말에 경탄을 더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 “나는 아직까지 스스로 작가라고 여겨본 적이 없어요.”라고 말했던 앨리스 먼로는 전화도 받으면서 일하는 틈틈이 원고를 작업한다고 했다. 그 작업물들 중 하나가 바로 ‘거지 소녀’다.

 

목차의 가장 첫 번째에 있는 <장엄한 매질>은 작품 안에서도 앨리스 먼로의 단편의 매력이 가장 극대화되어 있다. 단편임에도 장편 못지않은 서사의 스펙트럼이 그것인데, 매우 정교하게 직조되어 있다. 주인공 로즈와 아버지와 재혼한 새어머니 플로의 갈등 구조는 ‘장엄한’ 매질을 가하는 아버지의 위치를 상대적으로 약하게 만든다. 매질에 대한 폭력성의 묘사가 고통보다는 관계의 서열성에 초점이 맞춰진 탓이다. (매질의 실질적인 주체가 아버지임에도 플로인 것처럼 여겨지는 이유 또한 그렇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인물로, 베키의 아버지가 있다. 푸주한으로 구두쇠이자 가정의 폭군이며, ‘그의 입은 열리는 법이 없었다’고 묘사된다.(p.21) 베키네 가족들을 둘러싼 소문들 중 베키의 아이가 태어나 처리된 방식이라든지, 베키의 아버지 베키 타이드가 마을 사람들에 의해 처리되는 그로테스크한 방식은 기존 앨리스 먼로의 소설과는 달리 고딕 소설의 느낌도 풍긴다. 거기서 거론되는 마을 사람들 중 하나인 해트 네틀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드러나는 진실들.

“마멋 고기를 한 번 먹어봤어. 어느 겨울에. 다들 안 좋아할 거야. 헤.”

마멋 고기라는 생소한 어휘 속에 담긴 숨은 뜻을 추측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해트 네틀턴이 카운티 양로원에서 죽기 2주 전에 진행한 인터뷰에 대해,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곳에 있었던 플로는 알지 못한다. 그 최악의 소문들이 사실이었음을 알게 된다면 과거에 그러했듯 ‘세상에!’라고 외쳤을 플로는, 더는 그곳에 없다. 스스로를 완전히 거두어들인 플로는 ‘말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마치, 베키 타이드처럼. (로즈에게 장엄한 매질을 가할 때 플로와 아버지가 문이란 문은 모두 닫아놓은 것처럼 그의 입도 닫혀있었기에, 플로가 말문을 닫은 것은 상징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후로도 이어지는 단편 ‘특권’에서도 쇼티 맥길과 프래니 맥길, 이 두 남매의 놀음에 대한 묘사는 베키네 가족들에 대한 묘사처럼 고딕적인 데가 있다. 여기에 변주가 되는 요소로는 로즈의 성장성이 서서히 드러나는 것인데, 코라에 대한 로즈의 감정이 그렇다.

‘코라를 생각하면 로즈는 중심부가 녹아내리고 태운 초콜릿의 냄새와 맛이 나는, 결코 가닿을 수 없는 빛나는 흑점이 느껴지는 듯했다.’(p.69)

 

그런 후에 연결되는 단편 ‘자몽 반 개’에서는 로즈와 플로의 관계성에 변화가 찾아온다. 집에 이야깃거리를 가져오는 쪽이 로즈가 되면서 역할을 바꾼 것이다. 플로는 이제부터 사건의 기록자가 돼버린 로즈를, 학교의 소식들- 망나니들의 소식들- 을 기다리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또 한 번 로즈의 아버지의 수동성에 대해 서술한다.

 

“조심해라. 너무 똑똑해지지 않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야.”

로즈는 아버지가 혹시 듣고 있을지도 모르는 플로의 비위를 맞추려고 그렇게 말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플로는 가게에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플로가 어디에 있든 그녀가 듣고 있는 것처럼 말할 거라고 로즈는 생각했다. 그는 플로의 비위를 맞추려고, 혹은 그녀의 반감을 살까봐 전전긍긍했다. 아버지는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안전한 곳은 플로의 곁이라고.(p.88)

 

병세가 악화된 아버지가 재향군인병원으로 가게 될 즈음 플로는 어린 시절, 곰팡이가 핀 케이크를 먹으며 죽기를 기다렸던 자신의 모습을 회상한다. 로즈의 아버지야말로 웨스트민스터 병원에서 죽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었으므로 그들의 집에서 보낸 마지막 날, 로즈는 생각한다. 죽음이 그날을 어떻게 동강내는지 보려고 기다리는 모습을.

 

이 책의 제목이면서, 단편의 소제목이기도 한 ‘거지 소녀’는 성장의 터널 안에서 고군분투 중인 로즈의 모습이 그려진다. 패트릭은 그녀의 성장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매개물이다.

‘여학생들에게 가난은 상냥하고 헤픈 태도나 멍청함과 결합되지 않는 한 매력이 없다. 좋은 머리는 우아함의 징후, 즉 품격과 결합되지 않는 한 매력이 없다. 정말로 그랬을까? 그리고 그녀는 그런 걸 신경쓸 만큼 어리석었을까? 정말로 그랬다. 그리고, 어리석었다.’(p.137)

‘그녀는 정말이지 그를 우러러보고 존중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항상 도움닫기만 하고 끝나는 도약과 같았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녀는 정말로 패트릭을 존중했지만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존중하지 않았고, 정말로 그를 사랑했지만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p.195)

 

그래서였을까. 그들의 헤어짐, 파괴는 변화의 시작일 뿐, ‘파국’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하나의 과정으로 가기위한 시작이었다. 해설에서는 ‘장난질’에서 보여지는 로즈의 모습이 ‘디어 라이프’의 ‘일본에 가 닿기를’에서 등장했던 그레타와 겹친다고 했는데, 나 역시도 비슷하게 느꼈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에 로즈를 뿌리치는 클리퍼드의 모습에서는, 마찬가지로 ‘디어 라이프’의 ‘아문센’에 등장하는 의사가 겹쳐지는데 (비록 그들은 불륜이 아니지만), 결혼 직전에 실연당하는 비비언이 그에게 매달리는 모습에서는, 클리퍼드에게 매달리는 로즈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에 실린 단편 ‘쐐기풀’이나 ‘기억’에서도 불륜을 행하느냐 마느냐, 혹은 그대로 이어갈 것인지에 대한 앨리스 먼로 특유의 극적인 심리 묘사가 두드러진다.)

 

그보다 앞으로 거슬러 올라가 ‘야생 백조’에서는 어떠한가.

기차 안에서 그녀는 목사이거나 목사가 아닐지도 모르는 남자의 손을 허락함으로써 ‘피해자이자 공모자’가 돼버린다. 양가감정이 뒤섞인 시선으로 교외 지역을 바라보는 장면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침대보와 은밀한 얼룩을 닦는 데 쓰인 수건들이 음흉하게 펄럭거렸고, 학교 운동장의 아이들마저도 음탕하게 뛰노는 것처럼 보였고, 철도 건널목에 정차한 트럭 운전수들은 구부린 손아귀 속에 엄지손가락을 신나게 쑤셔박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런 교활한 희롱. 그런 통속적인 환영이라니. 박람회장의 입구와 높은 건물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페인트칠한 돔형 지붕과 기둥들이 그녀의 눈꺼풀 안쪽에 비친 장밋빛 하늘 위로 경이롭게 떠다니다 축포를 터트리듯 산산이 흩어졌다. 새떼가, 심지어 야생 백조떼가, 커다란 돔형 지붕 밑에서 깨어나 지붕을 뚫고 폭발하듯 하늘로 솟구치는 모습 같다고도 할 수 있었다.’

이 장면은 또한 ‘소녀와 여자들의 삶’에서 체임벌린 씨가 들판으로 데려가 자위를 하던 장면과도 비슷한 연장선에 놓여있지만 욕망하는 점에 있어서, ‘거지 소녀’는 수치심 쪽에, ‘소녀와 여자들의 삶’은 호기심 쪽에 무게가 실린다.

 

그리고 로즈와 패트릭 이들 사이에 놓인 또 하나의 존재가 있다. 어쩌면 앨리스 먼로가 큰 딸에게 가졌을 죄책감이 투영된 것이 아닌가 싶은 ‘애나’가 그렇다.

‘하지만 부모가 실수와 부조화로 자아낸 이 피투성이의 직물, 누가 봐도 찢어서 버려야 마땅할 이 직물이 애나에게는 아직도 삶이 있는, 아빠와 엄마가 있는, 시작과 안식처가 있는 진정한 안전망이었다. 이 무슨 사기란 말인가, 로즈는 생각했다. 모두에게 이 무슨 사기란 말인가. 우리는 우리가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전혀 갖추지 못한 결합을 통해 세상에 나온다.’ (p.246)

 

어쩌면 이 소설을 통틀어서 그리고 다른 소설에서도 영원히 기억될 이 대사는 한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든다.

‘애나는 길을 걸어가다 중간에 뒤돌아서서 부모를 향해 손을 흔들며 날카롭게 외쳤다.’

“이혼 축하해!” (p.246)

 

 

앨리스 먼로만큼 ‘여자’를 잘 이야기하는 작가가 또 있을까.

이혼 후에 자존감이 낮아지고 위축된 로즈의 현실적인 묘사는 이 소설의 출간 당시를 감안해본다면 몇 십년의 세월의 간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감하게 되는데, 시대를 관통하는 앨리스 먼로의 날카로운 통찰력에 다시 한 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그녀는 그들이 두려웠다. 그들의 박절한 도덕 관념과 냉정하고 경멸이 서린 얼굴, 그들의 비밀과 웃음, 음담이 두려웠다.’ 288p, ‘그러다 기다림의 시간이 더 이어지면서, 주말의 기다림은 가벼운 연습, 심각하고 진부하고 비참한 의식으로 가는 우발적인 도입부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편함에 손을 넣어 애써 글자를 보지 않고 우편물을 꺼내고, 다섯시까지는 학교를 떠나지 않으며, 전화기로 가는 시선을 차단하지 위해 그 위에 쿠션을 올려놓는다. 무심을 가장한다.’ 302.p, ‘그중에서도 가장 치욕스러운 것은 희망이었다.’ 304p, ‘그녀가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은 그녀가 수치스럽게 여길 거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랐다. 그것은 덜렁거리는 맨가슴이 아니라, 자신이 파악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실패였다.’ 364p)

 

한 가닥의 실이 내성적인 데서 뒤따르는 두려움이라면, 다른 한 가닥의 실은 그럼에도 놓을 수 없는 마음, 기다림이며, 희망이다. 그리고 곁가지로 따라붙는 나머지 한 가닥의 실은 깨달음, 이것들이 태피스트리처럼 촘촘하게 직조되어 여자의 일대기라는 하나의 그림을 이룬다. 섬세하게 포착해내는 삶의 단면들, 그 파렴치한 순간들에조차 세련됨을 잃지 않는 감수성은 온전히 그녀만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그것이 바로, 내가 그녀의 글을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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