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는 전 인생을 붙드는 강렬한 그 무엇이 있다. 삶의 어느 지점에서 소용돌이친 강렬한 원체험은 이후 삶의 방향과 방식에 관여하게 된다. 어떻게 드러내는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소설가는 이야기를 지어낸다지만 말짱 없는 이야기를 만들지는 않는다. 자신도 모르게 원체험을 변형하고 은유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붙드는 그 무엇을 말하게 된다. 어쩌면 애당초 그렇게 하기 위해 작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작가의 말을 미루어볼 때 이 작가 역시 그렇게 보인다. 그런 측면에서 이 소설은 작가의 원체험을 가로축으로 삼고 사회와 제도의 모습을 세로축으로 삼아 직조한 탐구한 작품으로 정의할 수 있겠다.
우선 작가의 무조건적이고 따뜻한 시선을 보자. 이 소설의 주인공 규대는 어질고 심지가 굳을 뿐 아니라 평생을 두고 지순한 사랑을 품고 지내는 인물로 그려진다. 또다른 주인공 도람도 자존감이 강하고 발랄하며 삶의 희망을 놓지 않는다. '갑자기 행방불명된 피붙이'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가능하게 한 인물 창조라 할 수 있으며 작가의 원체험이 슬핏슬핏 드러나기 때문에 독자에게도 스토리가 곡진하게 전달된다. 이렇게 진심과 소망이 갖는 힘은 아주 세다!
세상의 어떤 삶도 개인의 운명으로만 설명될 수 없으며 특히 개인의 몰락 이면에는 사회와 제도의 모순이 반드시 작동한다. 진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있어 아픈 경험이란 세상을 읽고 모순을 발견하는 통로가 되기 마련이고 이 소설 역시 그 점을 놓치지 않는다. 우선 화려한 전국체전과 다리 밑으로 내몰린 낙오자들을 대비시킨 기본 구도 설정이 돋보인다. 거기다가 사상의 자유를 꺾는 국가보안법이라는 제도와 개인의 삶을 흔드는 금권주의가 소설의 결을 두텁게 만들고 있다. 여성의 인권과 성을 유린하는 젠더 문제 또한 허투루 대하지 않는다. 원체험을 자신 속에 가두지 않고 세상을 분석하고 이해하려는 작가의 열린 시각이 있어서 가능한 작업이었다고 본다.
등장인물들이 지나치게 성적 관심에 매몰되어 있는 점, 다리 밑 낙오자들의 신상 얘기가 극단적이고 신파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약간의 아쉬움은 술술 읽히는 가독성, 삶을 해석하는 예리한 문장 들로 충분히 상쇄된다. 무엇보다 작가의 오랜 공력과 진심이 전해져서 좋다.
어라, 작가의 절필 선언에 눈길이 간다. 이 작품에 대한 결연함의 표현으로 이해하면서도 한 명의 작가를 잃는 아쉬운 대목이다. 하지만, 감히 추측하건대, 이 작가의 작업은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같다. 작가가 살아가는 방식이란 글쓰기를 벗어날 수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