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부라쿠민에 대한 차별은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사회적 문제로남아 있다. 2017년 일본 내각의 조사에 의하면 일본 인구의 75%가 부라쿠민에 대한 차별이 존재한다고 답했다. 부라쿠민에 대한 결혼 차별(40.1%), 편견을 담은 차별적인 언행 (27.9%), 신원조사(27.6%), 취업이나 직장에서의 불이익(23.5%) 등이 대표적이다.- P49
근대적 변화를 국가가 나서서 주도한 것도 대한제국(1897~1910) 시기인① 시기였다. 대한제국은 양전사업을 통해 근대적 토지 소유권을 증명하는 지계를 발급하고, 근대적 회사, 공장, 은행 등의 설립을 장려했다. 대한제국 이전인 1894년 한성에서 4개에 불과했던 기업의 수는 10년후인 1904년 222개로 증가했다. 대한제국의 조세 수입은 1897년 기준17만냥에서 7년 후인 1904년에는 3천만냥으로 200배 이상 증대되었다.
대한제국은 미국인 콜브란과 합작하여 한성전기회사를 만들고, 본격적으로 전기를 보급함과 더불어 전차를 개통(1899)했다. 한양의 전차 개통이 일본 도쿄의 전차 개통보다 3년이나 앞섰다는 것을 아무도 말하지않는다.
성리학이 쇠퇴하고 새로운 종교가 창시된 것 역시 ①시기였다.
조선왕조 500년을 지탱했던 유교적 관습은 쇠퇴하고 있었고, 서학은천주교와 개신교로 구분되어 보급되고 있었다.
동학의 제3대 교주 손병희는 천도교를 개창(1905)하여 보급시켰고,
단군을 숭상하는 대종교(1909) 역시 나철과 오기호에 의해 창설되었다. 불교는 여전히 민간 종교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역시 ①시기에 조선은 스스로 성리학 국가에서 탈피하여 다종교 국가로 변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들이 정착되고 안착된 시기가 일제강점기였을 뿐이다. 사실상 일제강점기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모든 변화는 국권이 피탈되기 이전의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에서 있었던 변화였다- P67
"당시 조선인의 국적이 일본이었다면, 일본인이 일본으로 보낸 쌀을수출이라 할 수 있는가?"- P89
한사람을 죽여서만 사람을 살리는 방법이 독립의 수단의 근본이다.‘- P134
윤봉길 의사가 의거를 며칠 앞두고 두 아들에게 남긴 유언이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P136
"나에게 마지막 한 발의 총알이 남았다면,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 밀정을 향해 쏘겠다."- P170
일제의 갑작스런 항복으로 국내진공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 분함을 김구는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가 국내진공작전을 실천에 옮기지 못함에 하늘이 무너진다. 우리가 연합국의 일원으로 일제의 패망에 나름의 역할을 했어야, 프랑스가 승전국의 위치에서 독일을 단죄한 것처럼 우리가 일본을 단죄할 수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하고 독립되었으니, 강대국에 한반도가 휘둘릴까 걱정이다."- P184
당연히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이 분단되었어야 했다. 동경 135도를 기준으로 일본을 관서와 관동으로 나눈 다음, 미국이 관서를 점령하고 소련이 관동을 점령했어야 했다. 소련이 동독을 장악하려고 했던 것처럼패망한 일본의 절반 땅을 요구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루스벨트의 뒤를 이어 미국의 대통령이 된 트루먼은 소련에게 일본의 절반을주느니 차라리 한반도의 절반을 주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다.
더구나 일본은 천황제를 유지하고 자국의 분할 점령을 막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일본은 미국에 자국의 분단 대신 한반도의 분단을 제시했다. 이런 제안을 한 일본과 그것을 받아들인 미국이 원망스럽지 않다면,
그 또한 이상한 일이다.- P196
문제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고위직의 빈자리를그들의 하수인인 매국노들이 차지했다는 것이다. 미군정은 조선인 매국노를 다시 고용한 것도 모자라, 오히려 그들을 승진시키기까지 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를 고문했던 말단 고문기술자가 고위 경찰로 승진했으며, 검찰 직원들은 시험을 거치지도 않고 일본인 검사가 떠난 자리를 차지하여 검사가 되었다. 또한 일본군 하급 장교들은 미군정 아래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의 장군이 되었다. 즉, 매국노들은 일제강점기보다 미군정기에서 더 큰 권력을 쥐게 된 것이다.
친일파들은 친미파가 되었다- P203
적절한 시기에 한반도를 독립시키겠다는 카이로회담(1943)의 약속을 실천하고자 미국, 영국, 소련의 외무장관이 모스크바에서 만났다. 이를 모스크바 3국외상회의(1945. 12.)라고 한다.
모스크바 3국외상회의에서 논의된 한반도에 대한 주요 의제는 남북한이 각각 미군정과 소련군정하에 놓여 있어, 자칫하면 한반도가 분단될 위기에 처했으니, 한반도에 통일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이에따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남북한 총선을 주관할 임시정부의 수립과그 임시정부의 구성을 논의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약속되었다.
그리고 통일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최대 5년의 미국, 영국, 중국, 소련4대 강국의 신탁통치가 약속되었다.
그러나 모스크바 3국외상회의 전문이 공개되기 전인 12월 27일, 동아일보를 비롯한 우익 계열 신문들은 1면의 톱기사로 "소련은 신탁통치주장,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을 실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신탁통치가 웬 말인가 싶었던 많은 사람들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반탁운동을 전개했고,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소련은 대중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이 기회를 틈타 우익은 반탁운동을 반소 및 반공운동과 병행했다. 그런데 미국 통신사의 기사를 받아쓴 동아일보를 비롯한 우익 계열 신문둔의 기사는 있어서는 안 될 오보였다. 사실 한반도의 즉각 독립을 주장한 나라는 소련이었고, 신탁통치를 주장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P205
4.3사건으로 미군정과 이승만정권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한 제주도민의 가족들은 여전히 제주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승만 입장에서는 자신에 대한 반감 정서가 큰 제주로 수도를 이전하는 것이 껄끄러웠을 것이다. 이승만은 군대 일부를 먼저 제주도에 파견했다. 군대는 4·3사건으로 고문을 당했지만 살아 있거나, 혹은 사망한 사람들의 가족들을 다시끌고가 죽였다. 이를 예비검속이라 한다.- P237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었다."- P246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점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기 이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승만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탄핵 대통령이다.- P250
최능진의 큰형 최찬과 둘째 형 최능현은 3·1운동에 참여한 뒤 사형을 구형받았다. 최능현은 탈옥한 뒤 중국으로 건너가 임시정부와 한인애국단 활동에 참여했다. 최능현은 윤봉길의거에 필요한 폭탄을 실험하는 과정에서 사망했는데, 그만큼 최능진 일가는 우리 독립운동에 깊이 이바지했다.- P260
최능진은 남한 경찰 조직의 구성이 부조리하다고 생각했다. 친일파출신의 인물들이 숙청되지 않고 버젓이 경찰로 활동하고 있음은 물론,
오히려 고위직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특히 최능진은 북한의 공산주의를 거부하며 월남했는데, 남한에서는 공산주의자보다 더 싫은 친일파가설치고 있으니 이는 그의 가장 불만이었다.
"일제주구가 일조일석에 애국자가 되어 민중의 지휘자가 될 수 없다."
- P261
반민특위가 경찰들에게 공격당했던 6월 6일은 우리의 친일청산이 실패하며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지 못한 비극의 날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날을 현충일로 기억한다.- P276
일생이 나쁜 짓거리투성이었다. 왜 나쁜 사람을 따르고 추종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이는 정의롭지 못한 자들이 또 다른 정의롭지못한자를 영웅으로 만들어, 자신의 정의로움에 대한 열등감을 해소하려는 수작이다.- P2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