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항상 현재보다 더 나은 삶을 추구한다. 인류는 지구상 생명체 중 유일하게 문명을 발달시킴으로써 지금보다 더 편리한 생활, 더 안락한 삶을 실현시켜왔다. 그리고 지금도 유토피아를 향한 꿈은 현재진행형이다. 인류의 꿈은 낙원에서의 삶이 아닐까.
자유와 풍부한 음식, 여유롭게 헤엄칠 곳이 있는 따뜻한 낙원, 누구나 바라 마지않는 이런 낙원 속에서 인간은 그렇다면 가장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가
하지만 이 소설은 에덴동산을 연상케하는 아름다운 낙원같은 섬 속에서 순수하고 천진한 아이들이 점차 인간다움을 잃어가는 모습을 통해 이 물음에 답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낙원과도 같은 환경 속에서 인간은 가장 삶에 대해 무관심해진다. 생존을 위한 욕구가 충족될수록 '이성적 삶'을 향한 열망과 필요가 사라져 반복적이고 원시적인 형태의 순수한 생존만을 추구하게 된다.
인간이 동물적 본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학습했던 인간문명이 자연 속에서 하나 둘씩 해체되어가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점점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나중에는 거의 광적인 능동성을 보인다.(봉화를 피우는 과정에는 그토록 소극적이며 수동적이었으면서!). 그것은 자발적인 인간다움의 포기라고 불러도 될만한 것이었다.
인간의 본능적 측면에 의지하는 삶은 미지의 존재의 출현에 대단히 취약하다. 인간에게 미지의 존재란 합리화할 수 없고 실체없는 공포의 대상이다.
파리대왕이란 결국 지적 탐구욕, 앎에 대한 능동성이 결여된 인간들이 느끼는 공포의 표상이다. 알고보니 단지 낙하산에 달린 시체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체없는 공포의 대상으로서 온 섬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낙하산에 달린 시체가 공포를 불러일으킬 만큼 무시무시한 존재였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런 실체없는 공포는 한 용기있는 선구자의 지적 탐구로 인해 그 허상이 간단히, 맥없을 정도로 간단히 극복될 수 있다.
인간다움이란 따라서 인간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어떤 상태나 결과가 아니라 그것을 이루어 가는 과정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