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해석과 관련해서 두 가지 상반되는 관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을 ‘안전하게’ 읽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들은 특별히 교단 전통에서 큰 비중을 자리하는 신학자에 의해, 성경을 연구한 결과로 만들어진, ‘교리’를 바탕으로 성경을 읽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안전하지 않은(?) 해석을 접할 때면 당혹스러움을 표하곤 합니다. 반면 어떤 이들은 성경을 ‘다양하게’ 읽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성경 본문은 독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예컨대 여성신학, 민중신학, 해방신학 등등의 각자 입장에 따라 ‘다양하게’ 읽는 것이 필요하고, 또 때로는 ‘다양하게’ 읽는 것이 오히려 성경을 올바르게(?) 읽는 방식이라 주장하기도 합니다.
사실 이는 성경 해석의 두 가지 측면입니다. 성경본문을 읽어갈 때에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기술적인(technical) 측면입니다. 쉽게 말해 성경본문은 텍스트입니다. 우리가 그곳에 기록되지 않는 것을 읽어낼 수는 없습니다. 기록되지 않은 것을 상상할 때에도, 이미 기록된 텍스트를 근거로 상상해야 마땅하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성경본문을 읽는 방법에는 ‘옳음’과 ‘틀림’이 (모호하긴 하지만) 구분되는 영역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기술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 능숙하게 읽어내고, 누군가는 미숙하게 읽어내니까요. 하지만 성경본문을 읽어감에 있어서 기술적인(technique) 측면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예술적인(artistic) 측면입니다. 같은 텍스트를 읽었을 때에 기록된 사실관계를 틀리는 것은 기술적인(technical) 오류입니다. 하지만 기록된 사실관계와 무관하게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있지요. 예컨대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이야기를 읽으면서 누군가는 아버지에게, 누군가는 첫째 아들에게, 누군가는 둘째 아들에게 감정이입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겠지요. 즉 이는 예술적인(artistic) 측면입니다.
일반적으로 여성신학, 민중신학, 해방신학의 성경읽기는 꽤 많은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지난 번에 제가 언급한 백부장의 종, 즉 파이스 논쟁이 한 예입니다.) 대다수의 비판은 사실상 해당 성경 읽기가 약간의 기술적인(technical) 오류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즉 자신이 미리 간직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할 수 있다면, 개연성이 떨어지는 방식으로 읽어내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비판을 받는 측면이 있지요. 비판을 하는 입장에서는 성경의 기록된 문자를 최대한 존중해서 읽어야 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 그런 읽기를 시도하고,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성경을 통해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다소 실존적인 읽기 경험을 추구하는 경향 혹은 그런 읽기도 가능하지 않겠냐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읽기에 있어서 ‘독자’에 더 방점을 두느냐, 혹은 ‘텍스트’ 혹은 ‘화자(하나님)’에 더 방점을 두느냐의 차이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더 해볼 수 있습니다. 기술적인(technical) 측면과 예술적인(artistic) 측면이 꼭 충돌하는 걸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두 측면은 읽기의 서로 다른 영역이며, 상호보완되어야 마땅합니다. (사실 모든 이들은 미숙하든 능숙하든 기술적인 읽기를 하고, 모든 이들은 텍스트를 자신의 입장에서 예술적으로 해석합니다. 물론 누군가는 의식하고, 누군가는 의식하지 못하지만요.)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기술적인(technical) 측면을 존중하면서도, 여성신학적 읽기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네, 바로 재클린 E. 랩슬리의 <이것도 하나님 말씀인가? : 세미한 소리에 귀 기울이기>가 바로 기술적인(technical) 측면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예술적인(artistic) 측면에서 여성신학적 가치를 읽어낸 사례들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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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다양한 장르가 있습니다. 그 중에, 개인적으로 제가 좋아하는 류의 장르는, 바로 ‘서사’입니다. 성경은 흥미롭게도 하나님이 창조주라고 고백하는 시편의 신앙고백으로 시작하지 않고,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세기 서사로 시작됩니다. 서사는 우리의 사유세계를 새롭게 구성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서사는, 의외로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중심 서사 외에도 다소 (우리 입장에서는) 불필요해보이는 단서들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저는 이용규 선교사의 <더 내려놓음>을 읽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이야기에서 첫 번째 아들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단지 아버지를 떠난 둘째 아들과, 둘째 아들을 환대한 아버지에게 집중했을 뿐이지요. 성경 서사가 매력적인 점은, 이처럼 우리가 읽는 방식에서 소외된 캐릭터, 소외된 대사, 소외된 장면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점이 바로, 우리에게 텍스트를 해석하는 무한한 가능성을 창출합니다.
재클린 E. 랩슬리의 책 부제가 <세미한 소리에 귀 기울이기>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이야기에서 첫째 아들의 서사는, (적어도 이용규 선교사의 <더 내려놓음>을 접하기 전의 저에게만큼은) 성경의 텍스트에 기록된, 하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세미한 소리’입니다. 저자는 야곱과 라반의 서사 속에서 라헬의 목소리를 발굴해내고, 첩의 시체가 토막난 사사기 마지막 서사에서도 살해당한 첩의 목소리를 발굴해내고, 출애굽기 초반부에서도 여성들의 목소리를, 그리고 룻기에서는 나오미의 목소리를 발굴해냅니다. 우리의 주류 읽기 방식에서는 잘 언급되지 않는 ‘세미한 소리’를 부각시키는 것이죠. 이는 이미 기록된 텍스트에 집중하는 것이기에, 매우 기술적인(technical) 읽기입니다. 오히려 이를 철저히 무시하고 읽는 것이 기술적으로(technical) 미숙한 읽기에 가까울 것입니다. 더군다나 저자는 성서학자 특유의 꼼꼼함으로, 히브리어 특유의 늬앙스를 잡아내며 매우 능숙한 기술적인(technical) 읽기를 구사합니다. 그리고 그 결론은, 여성으로 살아온, 그리고 페미니즘의 가치를 충분히 드러내고자 하는, 저자 고유의 문제의식과 매우 예술적으로(artistic)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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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말 그대로 정말 재밌었습니다. 또한 성경을 해석하는데 도가 튼 저자의 내공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정리하자면 세 가지 정도를 얻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기술적인(technical) 측면과 예술적인(artistic) 측면을 두루두루 갖춘 성경읽기의 예시를 엿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서사로 기록된 성경본문을 읽어나가는 모범적인 사례와 함께, 성경본문의 주된 내용 대다수가 서사로 주어졌다는 의미에 대해 좀 더 곱씹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이미 번역되어 소개된 바 있는 존 바턴의 <온 세상을 위한 구약 윤리>에 보면 마사 누스바움의 이론을 바탕으로, 구약본문의 서사 자체가 어떤 방식으로 윤리를 형성해나가는지를 다루고 있는데, 이와 관련된 실제 예시를 맛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실제 설교에서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라헬의 이야기에서는 딱 여전도회에서 설교하면 좋을 것만 같은 인사이트를 얻었고, 룻기의 이야기에서는 고통에 대해서 욥기와 함께 엮어서 설교하면 좋을 것만 같은 인사이트를 얻었습니다. 사사기 후반부와 출애굽기 전반부를 다루고 있는데 이 또한 설교로 엮어내기 좋은 내용을 담아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