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소나무님의 서재
  • 유령의 시간
  • 김이정
  • 15,120원 (10%840)
  • 2024-09-23
  • : 1,357

김이정 작가의 <유령의 시간>을 찾아 읽은 것은 한 페친의 추천 덕분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김이정 작가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나의 경우 소설이 좋으면 그 소설가에 대한 호감도 커진다. 소설 속 주인공과 함께 그 시공간에 한동안 빠져 지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특히 자전적 소설인 경우 전혀 모르던 작가임에도 그 주인공을 통해서 작가와 친밀감이 생긴다.
처음엔 제목만 보고 환타지 소설인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대체로 소설은 처음 시작 부분을 넘어가는 게 다소 힘든데 이 소설은 몇페이지 넘어가자마자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작가 후기를 보니 그럴만 했다. 작가 자신의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아픈 가족사가 소설의 줄기를 이루고 있어서다. 남쪽이든 북쪽이든 해방 전후 좌익지식인이 겪었던 삶은 그 자신의 불행으로 끝나지 않고 가족 전체에 다양한 그늘을 드리웠다. 우리 현대사가 보여주는 큰 아픔이다.


그런데 소설 속 사건들은 나와 전혀 무관한 일이 아니었다. 소설 속 주인공 김이섭과 그의 딸 지형만큼은 아니지만 내 어린 시절 기억 속에 남북갈등의 그늘이 있었다. 나의 부친과 끝내 이산가족이 되고만 둘째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때문이다. 부친은 미리 일본에 자리잡은 둘째형을 따라 유학생활을 했는데 해방이 되면서 집안 사정으로 다니던 대학을 포기하고 귀국한 뒤 다시는 그 형을 만나지 못했다. 부친은 한국에서 다시 대학을 마치고 평생 공무원 생활을 하셨는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매일매일 반주로 막걸리를 드셨고, 가끔 우리에게 낮은 목소리로 일본에 계신 둘째 아버지 얘기를 들려주셨다. 공무원신분 때문에 부친은 조총련계열에 속한 형님과 편지 왕래조차 하지 못하고, 건너건너 소식을 들어야 했다. 부친은 끝내 몹쓸 병을 얻어 51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셨다. 어렸을 때는 몰랐는데 이 소설을 읽으며 주인공 김이섭의 삶과 부친의 이야기가 묘하게 겹쳤다. 당신이 좋아하던 형님을 가까운 일본에 두고서도 끝내 왕래는 물론 소통조차 할 수 없던 한(恨)때문에 부친이 매일매일 술을 청한 게 아니었을까 싶었다.


<유령의 시간> 속 인물들은 너무 생생하고, 벌어지는 사건이나 배경 묘사가 빈틈이 없다. 특히 김이섭의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살기 위해 고투하는 모습과 어린 자녀들이 느끼는 심리가 마치 내 이야기처럼 다가왔다. 그래서 소설을 읽다가 갑자기 김이정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다. 검색을 해보니 나와 같은 또래였다. 그때문이었을까. 소설 속 인물들에 대한 친밀감과 함께 작가에 대한 호감도가 더 커진 것도 사실이다.


주인공 김이섭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여러 겹의 비극적인 가족사를 겪고, 더구나 본인 자신의 이념 행적으로 인해 남한 반공체제 하에서 일생 쫒기는 신세가 된다. 그 때문에 어느 곳을 가든 뿌리내리지 못한 팍팍한 삶을 살아가야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자식들에게 반듯한 정신을 남기고 떠난 것 같다. 그는 비록 ‘유령의 시간’을 살다가 떠났지만, 딸 지형을 통해 그가 마지막으로 남기고자 했던 그의 사적이면서도 역사적인 삶이 온 세상에 남겨질 기록으로 완성되었다.
그는 유령의 시간 속으로 사라져 없어지지 않고, 다시는 되풀이되어서는 안될 역사의 증인으로 다시 살아난 셈이다.

뜨겁고 긴 여름 끝에 간신히 맞이한 이 가을, 읽기를 권하고 싶은 소설 <유령의 시간>!


아버지가 술에 취하면 자주 부르던 노래, <애수의 소야곡)이었다. 엄마의 가는 목소리가 위태로운 음정에 실려 양식장호지 위로 날아갔다. 지형은 숨소리마저 멈추고 서 있었다. 정물처럼 차게 앉아 있던 엄마의 어깨가 노래를 따라 조금씩 흔들렸다. 달빛이 셔츠 주름을 따라 가로로 일렁였다. 밤이슬이스미는 듯 목소리가 점점 촉촉해졌다. 지형은 가만히 방으로들어갔다. 이젠 정말 자신이 보고 있었다는 걸 엄마에게 들키면 안 될 것 같았다. 지형은 누운 채 잠을 자려 애썼지만 잠은쉽게 올 것 같지 않았다. 평상에 홀로 앉아 흔들리던 엄마의 노랫소리가 귀에 쟁쟁했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