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목소리를 복원하는 작업
필로소픽 2025/11/1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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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전들
- 저스틴 토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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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0) - 2025-10-20
: 4,600
2023년 전미 도서상 수상작 『암전들』은 ‘그 어떤 책과도 닮지 않은, 미국 문학의 강력하고 새로운 목소리’라고 평가받는 퀴어 작가 저스틴 토레스(1980~ )의 장편소설이다.
『암전들』 책 앞날개에 따르면 이 소설은 ‘역사 속에서 지워지고 검열된 퀴어들의 목소리에 관 한 아카이브 자료를 독특하게 재구성’한다.
이 작품은 사실과 허구가 혼합되어 있다. 실존하는 연구서 『성적 변종들 : 동성애 패턴 연구』 을 중심에 놓고 허구의 인물인 후안과 네네가 등장한다.
책의 시작은 팰리스라는 요양 시설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해골처럼 앙상한 몸을 가진 후안 게이라는 노인이 이 젊은 푸에르토리코인 청년 네네를 불러들이는 장면이다. 후안은 네네에게 자기가 죽으면 팰리스에 남아 자기 방을 넘겨받으라고 한다. 단 하나의 조건이 있다. 잰 게이라는 여성 연구자가 남긴 두 권으로 나뉜 두꺼운 책 『성적 변종들 : 동성애 패턴 연구』 을 완성하라는 것이다.
『성적 변종들 : 동성애 패턴 연구』
이 책은 앞서 말했든 실존한다. 이 책의 저자 잰 게이는 1902년 미국 중서부 지역에서 태어났고 열두 살에 나이에 커밍아웃하였다. 잰 게이는 3백 명 이상의 여성을 인터뷰했고, 레즈비언인 그들의 성애사를 기록하여 출판하려고 했다. 당시 출판사들은 이 원고를 외설적인 주제를 담고 있다고 하여 출판하기를 꺼렸고, 이에 잰 게이는 성적 변동 연구 위원회를 설립한다.
잰은 중하급 계층에 속한 다양한 인종의 퀴어 300명을 대상으로 그들의 삶과 욕망을 연구했고 두 권짜리 연구 결과물을 만든다. 한편 이 연구 성과물의 표지에 프로젝트를 이끈 잰 게이의 이름은 없다. 위원회의 위원장인 조지 W. 헨리 박사의 이름만 『성적 변종들』 표지를 장식했을 뿐이다.
『성적 변종들』은 〈남성〉 과 〈여성〉 두 권으로 나뉘었고, 각각 양성애 사례, 동성애 사례, 그리고 자기애 사례라는 세 개의 범주로 세분되어 있다. 『암전들』에 등장하는 『성적 변종들』의 페이지들은 대부분에 검은 줄이 좍좍 그어져 있다. 검은 줄들은 이 책이 엄청난 검열의 대상이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의 페이지들은 『암전들』 곳곳에서 삽입되어 있다.
책의 저자에 잰 게이의 이름이 빠진 것과 책 내용의 대부분에 검은 줄이 쳐진 것은 성소수자의 목소리와 욕망을 억압하고 지워버리려는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읽혔다.
암전들(Blackouts)
blackout의 사전적 뜻은 정전, (정부, 경찰에 의한) 보도 통제[정지], 일시적인 의식[시력/기억] 상실 등이다. 후안이 팰리스 로비에 발견한 『성적 변종들』에는 거의 대부분의 내용에 검은 줄이 쳐져 있다. 후안은 주 공무원이 검열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후안과 네네는 모두 자살 시도를 했던 적이 있다. 사회에서 혐오와 배제의 대상이 되는 그들은 스스로를 이 세상에서 지우려는 시도를 했었다. 퀴어로서의 삶을 인정해 주지 못하는 주류 사회는 그들을 그렇게 내몰았다. 잰 게이의 연구 역시 많은 부분이 삭제되고 그의 연구에 기록된 성소주자의 욕망은 비정상으로 취급받는다.
❝어느 밤, 후안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 강제로 시설에 수용되었던 일을 가리키며 미국 의학의 어두운 정신사라고 표현했다. 1974년까지 미국 심리학회는 후안이 비블리아로카라고 표현한 『정신 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에 동성애를 포함했다. 퀴어인 것은 미친 게 분명했으며 치료 대상이었다. 1974년 편람에서 동성애를 제외한 조치는 정신의학계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고, 6년 뒤 1980년에는 자아 이질적 동성애라는 새로운 진단명이 등장해 비블리아로카 제3판에 실렸다고 했다. 이 진단명은 일종의 타협이자 <비정상적> 섹슈얼리티를 질병으로 정의해야 한다는 주장을 꺾지 않은 대다수의 심리학자에게 내민 올리브나무 가지였던 셈이다.❞
후안이 네네에게 남긴 프로젝트는 억압받은 성소수자들의 목소리를 암전에서 건져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네네는 후안과 끝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본인의 삶을 재구성한다. 네네는 후안 덕분에 본인의 삶을 말하는 법을 익혀간다. 『성적 변종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던 300명의 사람들과 네네의 삶과 욕망은 미친 것도 아니고 부자연스러운 것도 아니다. 편협한 시대는 언제나 성소수자들을 거부했고 그들을 구석으로 몰았다. 『암전들』에서는 이 모든 이들을 하나하나의 증언으로 기록해서 보여준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오랫동안 장바구니에 담겨 있던 게일 루빈의 『일탈』을 어서 빨리 결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포함해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을 사유하는 법'을 모른 채 살아간다. 주류 권력이 우리에게 부여한 방식대로 생각하고 감각하며 살아간다. 사회라는 권력은 인간을 납작한 틀에 넣어서 틀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비정상이라고 단정 짓는다. 우리는 틀에서 삐져나온 부분을 잘라내거나 욱여넣거나 아무튼 알아서 추스려야 한다. 그 좁디 좁은 틀에 스스로를 구겨넣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체득하지 못했거나 거부하는 사람은 늘 존재론적 불안에 시달린다. 우리는 소설을 읽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왔는지 고통받았는지 혐오 받았는지 들여다본다. 소설은 우리의 불안은 결코 해소해 주지는 못해도 그럭저럭 견딜 만하게 해준다.
『암전들』은 성적 욕망과 삶을 거부당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려주지만 나는 이 작품을 단순히 성적 욕망의 거부에 한정해 읽지 않았다. 우리가 가진 대부분의 것들은 외부로부터 평가받고 재단 받는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어떤 정체성은 주류에 속한 것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것들도 있다. 아마도 우리 대부분은 사회로부터 침묵하라고 명령받은 것들을 한두 가지씩은 가지고 살아갈 것이다(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암전들』은 명령하고 억압하는 힘으로부터 살아남아 숨 쉬려 노력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는 이 이야기 속에서 작게 숨 쉬었다.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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