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창의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필로소픽 2025/08/29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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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의 미래
- 정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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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0) - 2025-08-05
: 1,594
KAIST 생명과학과 교수이자 뇌인지과학과 겸임교수인 정민환의 첫 책 『기억의 미래』는 인간의 상상력과 추상적 사고 능력의 작동 원리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책은 현대 뇌 과학이 이룬 상상과 추상적 사고에 관한 주요 발견과 통찰을 정리한다. 인간이라는 종이 다른 동물들과 비교해 두드러지게 다른 점은 소위 '문명'이라는 것을 이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명은 인간 종의 특징인 고도의 추상적 사고 능력에서 나온다. 인간의 문명사회는 계속되는 과학, 기술, 예술,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계속되는 혁신 덕분에 발전한다. 저자는 이 혁신의 원동력은 바로 인간의 '뇌'가 가진 '추상적 영역에서의 자유로운 상상' 능력이라고 말한다.
전통적으로 뇌 과학은 뇌가 외부 감각 정보를 어떻게 처리하고 저장하는지와 이 정보를 바탕으로 어떻게 행동을 제어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상상력과 창의성에 관련된 뇌의 작동 과정인 내적 사고는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아왔다. 그러다가 2007년 뇌과학 분야에서 중요한 논문이 발표된다. 바로 해마에 대한 연구 결과였는데, 측두옆 깊숙한 곳에 위치한 해마가 기억을 회상할 때뿐만 아니라 미래를 상상하는 과정에도 관여한다는 것이었다. 해마는 단순한 기억 저장소가 아니라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나리오를 구체적으로 상상하는데 관여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해마 연구는 인간의 고차원적 추상화와 관련된 연구 등 뇌과학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이 연구 덕분에 2007년 이후 과학자들은 '기억은 어떻게 저장되고 인출되는가?'라는 질문 대신 '기억과 상상은 어떻게 이뤄지는가?'로 바꾸어 묻기 시작했다.
혁신적인 생각, 디폴트 네트워크, 그리고 '해마'
인간 뇌는 외부 자극에 반응해 특정 과제를 수행할 때 활성화되는 '과제 네트워크'와 백일몽을 즐기거나 도덕적 딜레마에 빠진 상황처럼 내적 사고를 할 때 활성화되는 '디폴트 네트워크'를 따로 가지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멍하게 쉬는 순간에도 디폴트 네트워크는 활발히 이런저런 상상을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유레카'의 순간들은 산책을 하다가, 샤워를 하다가, 아무 생각 없이 화분에 물을 주다가 떠오른다.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생각들은 디폴트 네트워크가 활성화되어있을 때 떠오르고, 해마는 디폴트 네트워크의 주요 구성 요소이다. 이 책의 1부에서는 주로 해마의 기능을 살펴보고 2부에서는 해마가 어떻게 이 기능을 수행하는지 알아본다. 그리고 저자 정진환 교수 연구팀의 주요 연구 성과인 '모사-선택'이론에 대해서 비중 있게 설명한다.
모사-선택 이론
정진환 교수 연구팀은 해마의 기억 기능과 상상 기능을 통합적으로 설명하는 모델로 '모사-선택 이론'을 제시한다. 해마는 서로 다른 몇 개의 하위 신경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치상회, CA3, CA1이 해마의 핵심 영역으로 간주된다. CA3 신경망은 다른 뇌 부위에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회귀투사가 풍부한 신경망인데, 바로 이 CA3 신경망은 해마의 경로 재생 및 상상 기능과 관련된 가장 유력한 후보로 손꼽힌다. 그리고 CA1 신경망은 상상한 내용을 평가하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밝혀졌다. 즉 해마는 단순히 기억과 상상을 떠올리는 데서 끝나지 않고 상상한 내용을 평가까지 수행하는 종합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인간의 뇌는 이를 통해 상황에 맞는 의사 결정과 행동 계획을 수립할 수 있다. 여기까지 말한 내용이 바로 '모사-선택'이론의 핵심이다. 정리하자면 CA3 신경망은 경험한 사건들의 재생과 더불어 경험하지 않은 사건들을 모사(시뮬레이션)하고, CA1 신경망은 CA3 신경망에서 재생되고 모사된 사건들 중 효용가치가 높은 사건을 선택적으로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모사-선택 이론의 핵심은 동물이 비활동적인 상태일 때 여러 이동 경로를 시뮬레이션하고 평가함으로써 출발 지점과 상관없이 임의의 목표 지점까지 최적의 경로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111쪽)
기억은 상상과 창의성의 재료
책에서는 새로운 상상은 기존 기억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중요하게 설명한다. 우리 뇌는 과거 경험 요소들을 자유롭게 추출하고 재조합하여 다양하고 새로운 미래의 시나리오를 만들어낸다. 우리의 창의성은 필연적으로 기억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바로 해마라는 뇌의 영역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과학자들은 기억의 범위와 강도, 상상 순간의 해마 신경망 상태, 해마로 투사되는 조절성 신경세포들의 활동 등 다양한 요소를 연구하고 해마의 기능과 역할뿐만 아니라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성의 기원을 찾으려 노력한다.
“디폴트 상태에서의 상상은 무작위성을 내포하기 때문에 그 내용은 결국 우리가 평소 어떤 정보를 학습하고 사고했느냐에 의해 달라진다. 다시 말해 상상의 재료를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상상의 질과 방향이 달라지는 것이다.” _209쪽
창의성과 다양한 경험의 중요성
디폴트 네트워크를 활성화시키는 독서
책에서는 창의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평소 의미 있는 내용을 지속적으로 학습하고 깊이 있는 사고를 습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한 분야에만 몰두하기보다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폭넓은 지식을 쌓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방금 말한 것은 새로운 내용은 아니지만, 새로운 연구 결과는 계속하여 이 주장을 뒷받침한다. 평소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지식을 쌓아온 사람이나 여러 분야의 전문가가 협력할 때 기존의 사고를 깨는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탄생할 가능성이 높다.
당연한 말이지만 평소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은 창의성 향상에 큰 도움이 되지만 개인이 경험으로 지식을 쌓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 책에서도 이 한계를 극복하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독서'를 강조한다. 혁신이란 기존의 틀을 깨는 과정으로 어떤 경험이나 지식의 혁신의 출발점이 될지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가 풍부한 경험과 폭넓은 지식을 쌓아가고 탄탄한 토대를 구축해 놓아야 새로운 아이디어가 탄생할 수 있다.
“요즘은 간접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경로와 형식이 매우 다양해졌다. 특히 유튜브와 같은 영상 매체를 통해 과학, 문학, 역사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쉽고 빠르게 습득할 수 있다. 영상 콘텐츠는 필요한 정보를 신속하게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효율적이지만 정보를 숙고하고 체계화하는 과정이 부족하다. 하지만 책과 같은 활자 매체는 다르다. 읽는 과정에서 특정 문장을 곱씹으며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거나 앞서 읽은 내용을 다시 찾아보고 비교하며 잣니의 지식과 신념 체계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과정이 자주 일어난다. 반면 영상 콘텐츠를 시청할 때는 앞뒤로 이동하며 내용을 비교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대부분 일방향으로 계속 소비하는 경향이 있다.” _212-213쪽
“시간을 두고 숙고하며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과 일방적으로 정보를 수용하는 것의 차이는 크다. 더군다나 책은 여러 날에 걸쳐 읽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독서 사이 시간에 자연스럽게 디폴트 네트워크가 활성화될 기회를 갖게 된다. 앞서 누누이 설명했듯이 디폴트 네트워크가 활성화되는 동안 우리의 기억은 다양한 방식으로 재조합되고 이를 통해 기존 지식과 새로운 정보가 연결되면서 창의적 사고가 촉진된다. ” _213쪽
『기억의 미래』의 맺음말에서 저자는 이 책은 결국 우리의 본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해 주는 특징인 고차원적 추상화 능력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뇌과학을 중심에 놓고 다양한 관련 학문의 연구를 살펴본다. 4부 <상상과 추상을 넘어서>에서는 1~3부에서 설명한 최신의 연구 결과를 종합해 개인 수준과 집단적 수준 양쪽에서의 창의성을 높일 수 있는 방안에 대해 고민한다. 또 4부에서는 인공지능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데, 저자는 범용 인공지능이 곧 도래할 것이라는 전망에는 거품이 끼여 있고, 인공지능의 창의성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존재한다고 본다. 이 책을 통해 재확인한 것은 인간 기억의 불완전성과 여기에서 비롯되는 가능성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이 결국은 나의 상상력과 행동의 밑거름이 된다는 것이다. 좋은 책을 열심히 읽는 것의 이로움, 새롭고 낯선 경험과 지식에 계속하여 노출하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는다.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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