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피 예찬』은 로베르라퐁출판사가 기획한 사상총서 가운데 하나로 1976년에 출간되었다. 이 총서는 ‘삶의 본질적인 요소에 관한 생각’이라는 주제를 사유하기 위해 각계 저명인사에게 주제 20개를 제시하였다. 이 책의 저자인 앙리 라보리는 외과 의사이자 신경생물학자, 철학자이다(그는 최초의 신경안정제 클로르프로마진을 개발하여 의학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인간의 행동과 인간이 맺는 사회적 관계, 사회 구조에 관해 이야기한다. 국내에서 특히 사랑받는 작가 베르나르 베르나르는 이 책 『도피 예찬』을 인생 책으로 꼽았다고 한다.
출판사 책소개 페이지에서는 이 책을 ‘신경생물학을 바탕으로 사회적 상황에 놓인 인간 행동에 관한 모든 분야를 해석한 책’이라 소개한다.
신경생물학을 바탕으로 인문학, 심리학, 사회학, 경제학, 정치학 등을 두루 섭렵한 라보리는 이 책에서 인간 존재가 살아가는 이유나 목적, 우리가 맺는 사회적 관계 등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 라보리에 따르면 “우리는 자신의 생물학적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살아갈 뿐이고, 수정란일 때부터 이 유일한 목적을 위해 프로그래밍 됐으며,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살아 있는 것 말고는 존재 이유가 없다.”(p12)고 말한다. 또 1장 <자화상>에서 그가 얻은 유일한 확신은 “모든 생각과 판단, 논리(적이라고 자평하는) 분석은 우리의 무의식적인 욕구, 다시 말해 동시대 사람들의 눈에 자기를 좀 더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게 하려는 노력이 지나지 않는다”(p11-12)고 말한다. 신경생물학자 다운 통찰이다. 인간은 생태적 환경의 구성에 전적으로 영향을 받고 생태적 환경은 우리에게 스며들고 고착되며, 다음 세대에 전해진다. 우리의 신경계는 우리가 인간으로 구실하고 생명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학습 능력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유리한 것과 아닌 것을 배워나간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에밀리 부틀의 『우리는 왜 진정성에 집착하는가』를 병행하여 읽었다. 진정성 문화에 감염된 사람들이 그토록 찾고 싶었던 ‘진정한 자아’, ‘진짜 나’란 라보리 식으로 생각한다면 단지 특정한 사회적 맥락의 발현일 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은 다른 인간들과 공유한다. 사회라는 공간에서 타인과 함께 존재하는 한 대립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대립은 반드시 위계질서를 형성하고 서열을 만든다. 한 사람의 욕구 충족을 위해 타인의 욕구는 소외되기 마련이다. 서열이 낮은 사람이 복종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했을 때 저항하거나 도피할 수 있다. 저항은 보통 파멸을 자초하는 일이고 ‘독자적인 저항은 정상을 자처하는 비정상적 다수에 의해 신속하게 그 싹이 제거되기 때문’(p17-18)에 우리에게 남은 것은 도피뿐이다.
라보리에 따르면 도피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향정신성으로 분류되는 의약품을 먹을 수도 있고 정신 줄을 놓기도 한다. 자살을 선택할 수도 있고 홀로 떠돌아다닐 수도 있다. 한편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 즉 상상 속으로 도피하는 방법도 있는데 라보리에 따르면 이 방법은 뒤쫓길 위험이 거의 없고 심지어 광활하고 만족스러운 영토를 손에 넣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라보리는 이 책에서 사랑, 인간 존재, 유년기, 타인, 자유, 죽음, 쾌락, 행복, 노동, 일상, 정치, 신앙 등 우리 삶의 다양한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과학주의를 강조하는 신경생물학자인 동시에 철학자이다. 그의 글을 읽으면 내가 호모 사피엔스라는 인간종(동물)인 동시에 흔히들 ‘가치’라고 부르는 것들을 추구하는 동물임을 줄곧 의식하게 된다. 그의 글은 이 책의 출판사에서 말한 것처럼 ‘과학적인 동시에 시적’이다.
라보리의 『도피 예찬』을 읽다 보니 수십 연간의 학문과 경험을 녹여낸 묵직하고 밀도 높은 에세이라는 점에서 제롬 케이건의 『무엇이 인간을 만드는가』가 떠올랐다. 석학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본인의 연구 분야를 넘어 다양한 학문을 횡단하며 촘촘하게 연결된 사유를 보여준다. 이런 책들을 읽고 또 읽는 순간 내 신경계에는 ‘인류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지식의 상속’(p119)이 일어난다. 무자비한 신자유주의 경쟁 사회에 지친 흔하디흔한 현대인 중 한 명인 나는 이러한 책으로 도피를 한다.
* 출판사 제공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