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쯤 바울복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칭의 논쟁”을 읽고
로고스 연구원 김철휘
신학 논쟁은 예나 지금이나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그 신학논쟁 중 가장 예민하고 불편한 논쟁이 있는데 그건 바로 “칭의 논쟁”이다. 초기 교회 때부터 시작된 칭의 논쟁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칭의의 문제는 일반적으로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여겨져 함부로 왈가왈부 할 수 없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최근에는 칭의에 대한 다양한 복음주의적 해석들이 전통적인 개혁파의 칭의적 개념들을 향해 도전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런 도전들은 전면에서 이루어지기보다는 비공식적으로 암암리에 서로의 주장을 각자 비교분석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나마 몇 년 전에 존 파이퍼와 톰 라이트의 칭의 논쟁이 관심을 끈 정도였다. 이렇게 언더그라운드에서 이루어지던 칭의 논쟁을 본서는 수면 위로 당당하게 끌어올렸다. 그리고 칭의에 대한 5가지 관점을 과감히 제시하였고, 각 관점을 대표하는 신학자가 기고한 글에 나머지 4명의 신학자들이 논평을 단 획기적인 편집을 하였다.
먼저는 칭의가 선언적, 즉 법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언약적, 관계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성서신학적으로 서로의 주장을 밝히고 있다. 칭의 논쟁에 있어서 가장 큰 이슈는 믿음에 대한 의미이다. 피스티스 크리스투라는 문구를 목적격 소유격으로 읽느냐 아니면 주격 소유격으로 읽느냐에 따라 각각 그 의미가, 그리스도를 믿음,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해석된다. 이 논쟁은 곧 칭의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나의 믿음과 나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 중 어떤 것에 더 무게감을 주느냐의 논쟁이다.
이 문제만큼 뜨거운 문제가 바로 행위에 관한 것이다. 칭의에 있어서 행위의 위치가 어떻게 되는가이다. 우선 종합적으로 신자의 삶에서 행위를 완전히 배제해서는 안된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여기서 행위의 위치는 각 신학자들 사이에서 미묘한 차이가 있지만, 그 행위가 공로나 삯이 되는 건 경계하고 있다. 결국, 그 행위는 진실한 믿음의 삶을 살아갈 때 드러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칭의가 어느 시점까지 우리를 보장하는가이다. 즉 현재적인가 아니면 종말론적인가이다.
본서를 읽기 전에 먼저 “드디어 제대로 한 판 붙는구나!” 하는 불손한 기대감을 가진 것이 사실이었다. 한국의 토론 문화에 익숙해서인지 끝내는 누군가의 의견을 끌어내리고 자신의 의견을 정당화하는 몹쓸 그림을 상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편협하고 공격적인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서로의 신학적 의견을 세워주고 인정해주는 훈훈한 모습이 인상깊었다. 한국의 신학적 토양에서는 비교적 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서로를 세워주는 것만은 아니었다. 각자의 신학적 의견에 반하는 부분에서는 단호하게 선을 그으며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고 있다. 당연히 이런 영역이 없었다면 이 책의 가치는 떨어졌을 것이다.
사실 이 책을 집어 들기 전에 꼭 읽어야 할까 라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칭의에 대한 영적지식들이 자칫 흐트러지지 않을까라는 기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장을 덮은 지금은 오히려 칭의의 다양한 신학적인 전통과 역사적 관점을 접하게 되었다. 그래서 총체적이고 균형 잡힌 깊고 넓은 칭의의 세계로 초대받았다고 자신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복음을 잘 모른다. 여러 가지 신학적인 관점들이 복음과 칭의를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배고플 뿐이다. 제임스 던이 진보적 개혁파인 버드의 글을 논평한 마지막 문장으로 이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우리는 언제쯤이나 바울의 복음 전체를 평화롭고 균형 있게 이해할 수 있을까?”-p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