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nerem2님의 서재
  • 바깥은 여름
  • 김애란
  • 13,050원 (10%720)
  • 2017-06-28
  • : 45,531
정말 딱 필요하던 찰나였다.
덜 느끼려고 하다보니 감정이 사라진 것 같아서, 움직이지 않는 감정이 없어진건 아닌지 두려워서 감정을 자극하는 소설을 읽고 싶어 고른 책인데 너무나도 딱 맞았다.
정말 25페이지만에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그 이후로도 쭉.
읽는 내내 김영하 작가의 『오직 두사람』과 우울감의 무게가 존재한다는 공통점을 느꼈다. 김영하 작가가 그린 우울은 절벽 줄타기처럼 위태롭고, 금방이라도 옆으로 고꾸라질 것 같이 느꼈는데 김애란 작가가 그린 우울은 섬세하다. 그리고 치유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옴니버스식 구성이고, 작품마다 작가는 목소리를 바꾸고 있다. 한 사람이 다른 환경의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낸다는건 참 대단하다. 어떻게 감정을 묘사하고, 읽어내고, 전달하는걸까? 상황과 심리 묘사에서 정말 감탄했다. 츠바키 문구점 이후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생생함이다.
책을 관통하는 단어는 "부재"와 "극복"인 것 같다. 정말 소중한 사람의 "부재"로 인해 발생하는 고통은, 비록 바깥은 여름이지만 정작 주인공들은 시간에 관해 얼마간은 잊은 채로, 그래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은 시간들을 살아낸다. 그리고 바깥은 여름이지만 선풍기 앞에만 앉아있지 않고 '극복'해보려 한 발자국씩 내딛는다. 제목을 다시 곱씹으니 바깥은에서 주인공들이 실내 혹은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있다는 생각도 든다. 바깥은 싱그러운 여름이지만 난 나가지 못했다.는 투의 느낌?
가을을 시작에서 감성을 채워준 책이다ㅎㅎ

p.13 이십여 년간 셋방을 부유하다 이제 막 어딘가 가늘고 연한 뿌리를 내린 기분, 씨앗에서 갓 돋은 뿌리 한 올이 땅속 어둠을 뚫고 나갈 때 주위에 퍼지는 미열과 탄식이 내 몸안에 고스란히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퇴근 후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우면 이상한 자부와 불안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요즘 아버지가 부쩍이나 안쓰럽고 존경스럽다. 한창 읽고 있는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통해 우리 아빠를 힘들게한 사회를 원망하고 있다. 우리 아빠도 복지가 좋은 나라에서, 사회적 안전망이 보장된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지금처럼 무서운 꿈은 안꿔도 될텐데.. 아버지 존경한다. 아버지 능력 덕분에 등록금 걱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으며 꽤나 오랫동안 철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런 슈퍼맨이 유학을 당장에 못보내줘 미안하다고 하신다. 정말이지 눈물날 것 같다. 감사하고 안쓰러워서. 28살이고, 내 삶을 내 힘으로 개척하는게 맞는건데 왜 나의 무능함과 게으름에 아버지가 죄책감을 느끼시는지..우리 앞길에 대해 충분히 준비해주셨는데..뭐가 또 그렇게 미안하시고 불안하신지..아버지들 모두 존경스럽다. 그리고 일자리를 가지고 있는데도 미래에 대해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드는 사회가 개탄스럽다.

p.20 그리고 그렇게 사소하고 시시한 하루가 쌓여 계절이 되고, 계절이 싸여 인생이 된다는걸 배웠다. 욕실 유리컵에 꽂힌 세 개의 칫솔과 빨래 건조대에 널린 각기 다른 크기의 양말, 앙증맞은 유아용 변기 커버를 보며 그렇게 평범한 사물과 풍경이 기적이고 사건임을 알았다. 아내와 나는 식탁에서 영우를 먹이고, 혼내고, 어이없는 말대꾸에 그만 허탈하게 웃어버리고, 그 와중에 권위를 잃지 않으려 재빨리 엄한 표정을 짓곤 했다. 영우는 거기서 젓가락질을 배우고, 음식을 흘리고, 떼쓰고, 의자 아래로 기어들어가고, 울고 종알종알 분홍 혀를 놀려 어여쁜 헛소리를 했다. 그러니까 거기 사 인용 식탁에서. 식탁과 맞붙은 산뜻한 올리브색 벽지 아래서. 집 앞 어린이집에서 보내온 복분자액은 바로 거기 튄 거였다.
-사소하고 시시한 하루가 쌓여 계절이 되고, 계절이 쌓여 인생이 된다. 평범한 일이 기적이고 사건이다. 스키부 합숙이 생각난다. 가족이 무탈하고, 건강하고, 여유가 있어야 합숙을 맘편히 할 수 있다는 걸 4학년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조금 더 빨리 깨달을걸..당연시 여기지 말고 감사하다고 더 얘기할걸..
-영우가 사고로 죽었다. 또 난..상상할 수가 없다 얼마나 괴로울지, 얼마나 어이없고 화가 날지..마음이 너무 아팠다. 머리 속에 파노라마로 장면이 만들어져 지나간다. 묘사를 참 잘하는 작가다...마음이 저리다. 어린 생명은 지켜져야한다. 스스로 그럴 힘이 너무나도 부족하니까. 반드시 지켜져야한다..

p.116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누군가 찾아온대도 안개에 가려 결코 못 알아볼 것 같은 밤. 수백 명이 왕왕거리는 횟집에서. 모두 소리 높여 떠드는 가운데 아무 말도 않는 사람은 이수와 도화 둘뿐이었다.
-오래된 취준의 끝은 이별인 레퍼토리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2000년대 초반에도 있었고, 오늘날에도 있고. 나의 속도도 모르는데 두 사람이 함께 속도를 맞춘다는게 기적이다. 노력으로는 안되는게 있으니...연인이 만나고, 유지되고, 헤어지고 이 모든건 정말 누군가 짜놓은 스토리 안에서 놀아나고 있는 것 같다. 한 주인공은 갑자기 왜그러냐며 당황할거고 한 주인공은 그동안 많이 참았다고 할거고. 매 편의 연극에서 역할은 바뀐다. 그러면서 전 사람을 이해하게 된다. 청년들이 마음껏 사랑하게 사회가 도와주었으면 좋겠는데..

p...그때서야 도화는 어제 오후, 주인아주머니를 만난 뒤 자신이 느낀 게 배신감이 아니라 안도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수 쪽에서 먼저 큰 잘못을 저질러주길 바라왔던 것마냥. 이수는 이제-어디로 갈까?
-이와 같은 감정을 나만 느낀게 아니었구나. 지은이도 느꼈고, 도화도 느꼈고, 작가도 느꼈구나. 헤어지고 싶을 때 그 말을 하기엔 너무 많은 생각과 감정이 밀려오고 그냥 편하게 먼저 잘못해주길 바라는...그 때 화가 나기 보단 휴..잘됐다 이런 마음이 드는거..용기 없는거 아는데 참 이용하기 용이한 상황이다..

p.132 중앙은 멸종 위기에 처한 언어를 보호하고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이 단지를 세웠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그리고 그건 중앙에서 내심 바라는 바였다. 그들은 잊어버리기 위해 애도했다. 멸시하기 위해 치켜세웠고, 죽여버리기 위해 기념했다.
-그렇다. 명백히 반대를 위해 그에 반대되는걸 하고 있다. 위선의 극치이고, 계산기의 극치이다. 죽여야 기념을 할 수 있으니까..뒷통수에 자극이 온 대목이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대처도 한번씩 곱씹어 보게 될것 같다.

<풍경의 쓸모>
p.150 햇빛이 충분치 않은 공간에선 이따금 플래시가 터졌다. 사진기는 펑!펑! 시간에 초크질을 하며 현재를 오려갔다. 플래시 소리는 낙하산 퍼지는 기척과 비슷해 우리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함께 살았다는 안도를 줬다. 운전자를 덮치는 에어백마냥 푹신한 충격을 줬다...어머니가 "펑!" 불빛을 터뜨리면 선택되지 못한 나머지 풍경이 하얗게 날아갔다.
-이 후로 몇 장을 더 썼는데..쓰다가 날아갔다ㅠㅠㅠㅠ
사진 찍는 순간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다. 특히 현재를 오려갔다라는 표현. 삶이라는이어진 천에서 현재, 지금을 펼쳐가며 흘려보내지 않고 오려서 간직한다는 느낌.
사진을 찍는다는 것. 지금 이 순간을 오래도록 다시 꺼내보고, 추억할 수 있게 잠시 멈추고 기록한다는 것.

p.156 1월. 연이은 한파와 폭설 속에서도 한국은 여전히 분주해 보였다. 반면 차창 너머 여름은 느긋했다. 푸르고 풍요롭고 축축해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된 정보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손에 스마트폰이 아닌 스노볼을 쥔 기분이었다. 유리볼 안에선 하얀 눈보라가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인. 시끄럽고 왕성한 계절인. 그런.
-대조는 이렇게 쓰는거구나! 대조의 효과를 근래에 이렇게 크게 느껴본적이 없다.
2014년 여름. 나는 발전한 제도와 사람들의 워라밸이 충족되고,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유럽에 있었다. 그 속에 있으면서 나도 그들처럼 아침에 빵을 먹고, 커피를 느긋하게 마시고, 그들에 가까워지려 그들을 동경하며 지냈었다. 크로아티아 스플리트에서 한국의 소식을 전하는 뉴스를 봤다 우연히. 한국은 여전히 세월호로 아팠고, 누군가는 끊임없이 비방당하고 있었다.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지 못했고, 사람들은 여전히 열심히 밤낮없이 일하고, 워라밸이라는 단어에서 '워'만 남은 그런 모습들. 한동안 이 사회에서 떨어져있으니 같은 마음으로 분개하지 않아도 됐고, 스트레스 받지 않아도 됐다. 참 편했다. 가끔 이런 사회 탈출이 필요하다고도 느꼈고, 지금도 같은 생각이고..

p.158 풍경이 더이상 풍경일 수 없을 떄, 나도 그 풍경의 일부라는 생각이 든 순간 생긴 불안이었다. 서울 토박이로서 내가 '중심'에 얼마나 익숙한지, 혜택에 얼마나 길들여졌는지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내가 어떻게 중심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지 잘 보였다.
-풍경이 더이상 풍경일 수 없을 때.란 어떤 의미일까? 내 뒷배경처럼 아주 가깝게 붙어있어서 볼 수 없는 그런? 더이상 낯설지 않고, 익숙하고,그렇기에 새로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그런?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들의 말을 들어보면 '서울'이라는 곳에 모든게 이뤄진다고 한다. 전시, 공연도 서울에서 열리고, 연예인들도 다 서울에 있고, 기업 본사도 서울에 있고. 이런 말을 들을 때 나도 그제야 서울에 산다는게 혜택을 받은거구나 느낀다. 정우도 그런 혜택을 받으며 살았기 때문에 그 당연함이 없는 환경에서 중심에서 멀어졌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p.163 다른 사람 눈치를 보지 않아도 손해 보지 않는 환경에서 살아왔거나 반대로 그렇게 잃은 것들을 향해 복수하듯 떠들어대는 성격인 듯 했다.
-대부분의 교수들은 정말 다 이런가보다..ㅋㅋ 그들의 부유한 성장배경 때문이든 아니면 독야청청 고귀한 그들의 자존에 대한 보호 때문이든...눈치를 본다는 것, 갖고 싶은 것이 있지만 양보한다는 것, 원만하게 넘어간다는 것, 손해보거나 기분이 나빠도 그냥 넘어간다는 것. 나는 눈치를 예민하게 섬세하게 많이 보는 터라 눈치가 가끔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의 발언으로 분위기가 싸해지거나 정적이 흐르거나. 이런 것에 대한 두려움을 좀 없애고 싶다.

p.175 아버지는 전보다 더 늙어 있었다. 아마 아버지의 눈에 비친 나도 그랬을 거다. 총기 흐려진 눈, 주관과 편견이 쌓인 입매, 경험에 의지하는 동시에 체험에 갇힌 인상을 보았을 거다.
-말을 예쁘게, 생각을 예쁘게 가져야겠다고 다짐한다. 주관과 편견이 쌓인 입매. 생각을 말로 전하다보면 전하는 말의 성격의 따라 입매가 올라가고 내려가고. 예쁘게 말하고 생각해야겠다. 예쁜 입매, 적어도 추하고 내려간 입매는 갖지 말아야지.
경험에 의지하는 인상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은데 체험에 갇힌 인상은 모르겠다. 사람은 나이를 들수록 자신의 경험에 더 자부심을 갖게 되고, 그 경험으로부터 얻은 지식과 지혜와 대처방식에 대해 높이 평가하는 것 같다. 체험에 갇혔다는 말을 무슨 뜻일까?
" '경험'은 '자신이 실제로 해 보거나 겪어 봄 또는 거기서 얻은 지식이나 기능'을 뜻하는 말이고, '체험'은 '자기가 몸소 겪음 또는 그런 경험'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뜻풀이에 따르면, '경험'과 '체험'이, 쓰이는 맥락이 확연히 구별되는 말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한번도 생각해본적 없는 차이점이어서 당장 네이버 검색을 했다. 별 차이 없단다. 체험에 갇힌..왠지 새로운 시도는 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온다. 내가 알고 있는 것만으로 세상을 판단한다는 그런 느낌. 나이 든다는 것. 새로운게 없어 재미없다고 조교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좋아하고, 새로운 일에 가슴 뛰는 그런 사람으로 늙고 싶다.

<가리는 손>
p.189 한동안 나 자신이 비리고, 뜨겁고, 미끌미끌한 덩이로 느껴졌다. 이름이 지워진 몇십 킬로그램짜리 영양 공급 팩이 된 기분이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나를 그렇게 대했다. 그게 격려나 존중의 형태였대도 그랬다. 영화나 드라마 속 산모는 내색 않던데, 나는 수유가 참 힘들었다. 젖 뭉침에, 유선염증에 유두 끝이 불에 덴 듯 쓰린데, 배가 고파 우는 아이에게 젖을 물릴 수도 뺄 수도 없어 나도 같이 울어버린 게 몇 번이었다. 더구나 돌 무렵엔 이 나느라 잇몸이 간지러운지 재이가 내 젖꼭지를 자주 깨물었다. 어느 땐 하도 세게 물어대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아이를 던질 뻔한 적도 있었다.
-오마이갓...모유수유..출산도 너무 겁나는데 모유수유도 겁난다..ㅋㅋ 정말 세세하게 묘사가 되어있다. 자신이 모유수유를 하면서 느낀 감정과 육체적 고통을. 남자들도 이런 고통을 어슴프레라도 짐작했으면 좋겠다.

p..익숙한 것과 헤어지는 건 어른들도 잘 못하는 일 중 하나이니까. 긴 시간이 지난 뒤, 자식에게 애정을 베푸는 일 못지않게 거절과 상실의 경험을 주는 것도 중요한 의무란 걸 배웠다. 앞으로 아이가 맞이할 세상은 이곳과 비교도 안 되게 냉혹할 테니까. 이 세계가 그 차가움을 견디려 누군가를 뜨겁게 미워하는 방식을 택하는 곳이 되리라는 것 역시 아직 알지 못할 테니까.
-맞다. 스물일곱 때도 그랬고, 스물여덟도 그렇다. 익숙한 것과 헤어지려면 정말 많이 아쉽고, 꼭 그래야만 했을까와 그러지 말걸이라며 되돌릴 수 없는 시간에 원망을 보내고, 그 사실에 아프고. 정말 잘 못하겠다.
거절과 상실의 경험. 너도 가지지 못할 때가 있고, 니가 가진 것을 빼앗길 수도 있고. 교육은 참 어렵다..강아지들도 젖을 떼는게 그들이 경험하는 첫 거절이라고 한다. 그런 거절의 경험이 쌓여 성견이 되어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당하는 거절의 화살을 견뎌낼 수 있다고.
차가움을 견디려 뜨겁게 미워한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대통령의 무지와 무관심으로부터 너무 차가웠고, 이를 견디려 촛불을 들며 정말 뜨으겁게 그녀를 미워했다. 이 상황을 이렇게 설명받으니 이치를 깨달은 듯한 느낌이다.

p...그날 네가 얼마나 어렵게 노래를 마친 건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내게 교회는 늘 안전한 장소처럼 보였으니까. 종교를 갖지 않은 내가 굳이 아이를 그곳에 보낸 것도 그 때문이었던 것처럼. 돈버느라 재이 곁을 떠날 때 나 대신 누가 아이 옆에 있어주길 바랐나보다. 그게 나와 전혀 면식 없는 신이라 해도.
-부모의 마음은 이런거구나. 부모도 아이로부터 독립하지 않으면 참 많이 불안해야한다는걸 우리 부모님을 보며 느낀다. 그러면 자식은 실망시켜드리지 않으려 다른걸 더 해내보여야만할 것 같은 의무가 든다. 기대하던 취직자리에서 떨어지고, 티비를 보는데 우리나라는 예능에서조차 "가족"의 소중함을 설파하려 애쓴다. 성공했다 그 설파. 가족은 한없이 따듯한 존재이고, 비록 티비에 나오는 장면은 그들의 수많은 좋고 나쁜 순간 중 좋은 순간들 뿐이겠지만, 가끔은 서로에게 부담이 되는 존재고, 그래도 돌아올건 여기 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가끔은 떠나 있고 싶은 그런 존재이다. 응? 갑자기 왜 얘기가 이리로 튀었지?

p.199 요양병원에는 몸이 불편한 어르신이 많다. 전쟁을 겪은, 전쟁을 아는, 여전히 전쟁중인 분들이. 여느 무리가 그렇듯 그중에는 좋은 분도, 그렇지 않은 분도 있다. 고집스러운 얼굴로 이상한 식탐을 부리고, 비위를 맞추면 반말하고, 사무적으로 대하면 훈계하고, 식사 후 아무 할 일도 없으면서 새치기하고...-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 가진 도덕이, 가져본 도덕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래.
-세상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참 많이 일어난다. 가까운 예로 왜 말을 저렇게 밖에 못할까, 왜 저렇게 생각할까? 그들의 과거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를 관통하는 그들의 정체성을 들먹이며 이해할 시도조차 하기 싫을 때가 다반사다. 그럴 때 '카베진'처럼 들으면 그래~그래서 그런가보다. 하며 단박에 날 이해시키고, 머리도 식혀주는 말이 있다. 이 문장도 그렇다. 두고두고 기억해야지.
"가진 도덕이, 가져본 도덕이 그것밖에 없다."
이 말은 흘겼던 눈을 동정하며 한 층 깊게 바라보는 눈으로 바꿔줄 것 같다. 실천해봐야겠다.

p.212 애가 어릴 땐 집 현관문을 닫으면 바깥세상과 자연스레 단절됐는데. 지금은 그 '바깥'을 늘 주머니에 넣고 다녀야 하는 모양이다. 아직까진 친구들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모바일 게임을 하고, 실시간 인터넷 방송을 즐겨 보는 정도 같지만, 가끔 아이 몸에 너무 많은 '소셜'이 꽂혀 있는 게 아닌지 걱정된다. 온갖 평판과 해명, 친밀과 초조, 시기와 미소가 공존하는 '사회'와 이십사 시간 내내 연결돼 있는 듯해. 아이보다 ㅁㄴ저 사회에 나가 그 억압과 피로를 경험해본 터라 걱정됐다. 지금은 누군가를 때리기 위해 굳이 '옥상으로 올라와'라 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이니까. 아이가 지금 나와 식사를 하는 중에도 실은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얻어맞으며 피 흘릴지 몰랐다.
-이 대목도 참 현상을 잘 풀어냈다. 소셜이 아이 몸에 꽂혀있다고 표현함으로써 사회가 아이에게 아픔을 줄 것이다라고 예측하고 있다. 소셜의 순기능은 사람이 외롭지 않게 서로서로 연결되어 일상을 공유하고, 공감하고, 가상의 마을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요즘 청소년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cyber bullying은 폭력이다 정말. 부모는 울타리를 가상의 마을에서까지 쳐줘야한다. 아이에게 일어나는 일을 모두 통제할 수 없으니 스스로 지키는 법을 가르치는게 중요한 것 같다. 그리고 언제든 나에겐 말해도 된다고, 말할 때 화부터 내지 않고 귀부터 여는 그런 엄마가 되는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가야겠다.

p.. 어느 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강렬하고 빠른 속도로 휙. 그렇지만 각자 내부에 무언가가 타서 없어졌다는 건 알아. 스쳤지만 탄 거야. 스치느라고. 부딪쳤으면 부서졌을 텐데. 지나치면서 연소된 거지. 어른이란 몸에 그런 그을음이 많은 사람인지도 모르겠구나. 그 검댕이 자기 내부에 자신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암호를 남긴. 상대가 한 말이 아닌. 하지 않은 말에 대해 의문과 경외를 동시에 갖는...'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라, 자리에 누울 땐 벗는 모자철머 피곤하면 제일 먼저 집어던지게 돼 있거든.
-암호란 자신이 내린 상황에 대한 정의와 상대가 하지 않은 말을 상상하며 만들어낸 문자일 것이다. 나도 암호를 참 많이 만들었고, 그 안에 꼬여있었다. 그런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어쩔 수 없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고, 우린 끝났다. 라고 생각하며 그대로 두었다. 그러고나니 마음이 한결 더 편해졌고.
서로가 만나 연소되었다는건 타는 과정보다는 연소되어 CO2로 날아가버렸다로 이해된다. 서로에 대한 미움도, 그리움도, 사랑은 더더욱 남아있지 않은 그런, 모든 걸 다 쏟아부은 상태. 어른은 상처 받고, 상처를 그대로 두거나 회복하려 애쓰면서 산 흔적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나보다.

p.215 해마다 아이 생일 초를 밝힐 때면 기쁘고 엄숙한 마음이 든다. 긴 하루가 모인 한 해, 한 해가 쌓인 인생이 얼마나 고되고 귀한 건지 알아서.
-앞의 영우 편에서도 부모가 말하는 아이의 시간들, 날들, 인생들에 대한 표현이 참 좋다. 일일히 다 기억할 순 없지만, 그 기억에 남지 않는 수많은 날들과 기억에 남는 몇 날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쌓여 지금의 인생이 되었다. 난 지금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 목적지로 보이는 듯한 섬은 간간히 눈 앞에 나타나는데 물 속으로 꺼져버려 마음도 같이 훅 하고 내려앉는다. 지금도 나중에 돌아보면 그냥 별다를거 없는 그런 날들일텐데..조급해하지 말아야겠다. 우선은. 내가 할 수 있는건.

p.220 어두운 겨울밤. 아이와 나 사이에 노란 빛이 일렁인다. 불빛 아래서 우린 왜 조금씩 달라 보일까...그런데 그걸 본 순간 내 속에서 짧은 탄식이 터져나온다. 웃음 고인 아이 입매를 보자 목울대가 매캐해지며 얼굴에 피가 몰린다. 불현듯 저 손, 동영상에 나온 손, 뼈마디가 굵어진 손으로 재이가 황급히 가린 게 비명이 아니라 웃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말 그렇다면 그동안 내가 재이에게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얼마나 놀라고, 소름이 돋았을까..정말 허탈한 순간이었을 것 같다. 자식이 몇 해째 준비하던 시험에 떨어지거나 취업에 또 막혔을 때보다 더. 엄마로서도 정말 인간적인 고민을 했을 것 같다. 부모의 역할에서부터 요즘 아이까지. 나도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 가족을 지키고, 아이를 키우기 위해 돈도 벌고, 그 바쁜 와중에 육아도 하고 정말 우리나라사람들 많이 투자하고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가장 중요한 아이의 생각의 척추, 인성에는 관심이 없는건가 싶다. 저마다의 교육철학이 있는거라지만 같이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하는데..물론 나도, 내 또래도 이걸 잘하고 있는건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아 우리때는 안그랬는데 라는 생각이 드는건 젊은 꼰대 경보령이겠지.. 정말 고민이다. 어떻게 키워야하나 아이를. 어떻게 교육해야하나..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p.228 유리벽에 대가리를 박고 죽는 새처럼 번번이 당신의 부재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때야 나는 바보같이 '아, 그 사람, 이제 여기 없지...'라는 사실을 처음 안 듯 깨달았다.
-상실의 아픔을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구나...중학교 1학년 때였다. 교실로 난 긴 복도를 걸어가는데 복도 끝에 실내화 주머니 같은 물체가 앉아있다가 푸닥푸닥하더니 반대편 복도 끝에 난 창문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졌다. 부엉이 같은 거였다. 부엉이도 창문인 줄 몰랐겠지. 닫혀있는지 몰랐겠지. 떨어지고 나서야 밖이 아니었구나 당황했겠지..

p.245 우리는 웬만한 일엔 크게 들뜨거나 실망하지 않는 삼십대 중반의 말투로 편안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호수에 돌을 던져도 파장이 웬만해선 일지 않던 감정이 연이은 탈락탈락탈락 소식에 이제는 파도가 친다. 삼십대 중반이면, 어느 정도, 나이에 맞는 일들을 겪다보면 조금 더 큰 돌이 떨어져도 파도가 치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도 했다. 앞으로 닥쳐올 일이 이보다 크면 클텐데, 면접에서 떨어지기 전인 어제와 떨어진 오늘은 별반 다를 거 없는데 그만 털어버리자 싶었다. 그래. 앞으로 상처받을 일이 수두룩할텐데 여기서 무너지면 안되지!

p.261 현관 앞에 서서 당신 것과 내 생일을 섞어 만든 비밀번호를 눌렀다...고요하고 어둑한 안방에서 '우리집 냄새'가 났다. 당신과 같이 만든 냄새였다...붉은 반점은 한국에서부터 내 몸에 들러붙어 영국까지 따라왔다, 기어이 같이 귀국했다. 농작물을 해치는 메뚜기떼처럼 우르르 몰려와 성실하게 내 몸을 갉았다.
-같이 만든 냄새. 또 보물같은 표현을 발견했다. 묘사할 때 전혀 예상치 못한 것과 어우러지게 하는게 작가의 정말 대단한 능력이다. 같이 생활하며 같이 남기고 , 만든 냄새. 냄새도 참 사람 어지간하게 잘 기억하게 한다.

p.265 ..몇 번이나 연습했을 문장들이 직선 위에 불안정하게 서 있었다. 한 자 한 자 그 글씨를 따라가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어요'라는 부분에선 그만 쓸쓸하게 웃어버리고 말았다...눈앞에 얼룩진 문장 위로 지용이의 얼굴이 겹쳐보였다. 살려주세요. 소리도 못 지르고 연신 계곡물을 들이키며 세상을 향해 길게 손 내밀었을 그 아이의 눈이 아른댔다.
-그냥 얼핏 상상해도 숨이 멎을만한, 마냥 안타까움에 눈물이 흐를만한 대목..

p..잠시라도, 정말이지 아주 잠깐만이라도 우리 생각은 안 했을까. 내 생각은 안났을까. 떠난 사람 마음을 자르고 저울질했다. 그런데 거기 내 앞에 놓인 말들과 마주하자니 그날 그곳에서 제자를 발견했을 당신 모습이 떠올랐다. 놀란 눈으로 하나의 삶이 다른 삶을 바라보는 얼굴이 그려졌다. 그 순간 남편이 무얼 할 수 있었을까...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당신을 보낸 뒤 처음 드는 생각이었다...허물이 덮였다 벗어졌다 다시 돋은 내 반점 위로. 도무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얼룩 위로 투두둑 퍼져나갔다. 당신이 보고 싶었다.
-또 하나의 부재가 있다. 선생님이 아니었다해도 왠지 이 분은 뛰어드셨을 것 같다. 물놀이를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고, 참 멋있다는 생각이 두번째로 든다. 가끔 상상한다. 내 앞에서 위급상황이 발생하면 어쩌지, 돕다가 나도 위험해질 그런 상황이 생기면 어쩌지? 용기를 낼 것이다. 지금은 사회 구성원, 시민, 어른으로서의 책임감이 펌핑된 시점이니까 ㅎㅎ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