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리뷰] 고요한 읽기
cj 2025/12/22 08:15
cj님을
차단하시겠습니까?
차단하면 사용자의 모든 글을
볼 수 없습니다.
- 고요한 읽기
- 이승우
- 15,300원 (10%↓
850) - 2024-08-28
: 18,428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가 작품이란 “그 책이 없다면 스스로 보지 못했을 것을 볼 수 있도록 작가가 독자에게 제공하는 일종의 광학기구”라고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 유명한 문장을 인용하면서 밀란 쿤데라는 친절하게도 “독자는 독서하는 순간 자기 자신에 대한 고유한 독자가 된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책을 읽을 때 독자가 실제로 읽는 것은 책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책(속 문장)은 ‘나’를 잘 읽도록 돕는 광학기구일 뿐이고, 그 광학기구가 있어서 나는 ‘나’를 읽을 수 있게 됩니다.
...분류하고 범주화하는 것이 보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외부만을 발견하는 것이 그 때문이다. 나는 나의 내부가 발견되고 규정되는 걸 견디지 못한다. 발견이 곧 발각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내부, 즉 ‘나’만 빼고 다 발견한다. 나는 ‘나’만 빼고 다 규정한다. ‘나’를 보는, 볼 수 있는 눈이 나에게 없기 때문이다. ‘나’는 시간/신의 눈에 의해서(만) 발견된다. 그것은 세상의 끝에서만 가능하다. 세상의 끝에 이르기 전에 ‘나’는 결코 발견/발각되지 않는다. 그 전에는 ‘나’가 결코 시간/신의 눈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원한 사랑은 없다. 영원한 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잃어버릴 두려움 없이’ 사랑할 수 없다. 잃어버릴 두려움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말이 곧 하나의 국어다. 한 사람의 말은 다른 사람에게는 하나의 외국어이다. 세상에는 말을 하는 사람 수만큼의, 어쩌면 말해지는 상황만큼의 국어/외국어가 존재한다.
“차(찻잎)가 많으면 향기가 써서 맛이 떨어지며, 물이 많으면 색이 나지 않고 맛이 떨어진다.” 너무 빨리 마시면 맛이 나타나지 않고, 너무 늦으면 향을 잃는다.
말에는 정신(생각)이 담겨 있다. 그러나 정신(생각)이 지나치면 찻잎이 너무 많은 차가 쓴맛을 내는 것처럼 부담스러워진다. 반대로 충분하지 못하면 색이 나지 않고 향도 나지 않는 차처럼 무미건조해진다. 내용과 형식이 잘 어울려야 한다는 뜻이겠다. 말 속에 생각이 잘 풀어져야 하지만 아예 생각이 담겨 있지 않아도 곤란하다. 균형 있게 잘 어울리지 않으면 문장은 알아듣기 어렵거나 하나 마나 한 것이 된다.
“신앙은 의심을 제거함으로써가 아니라 그것을 자기 안에 있는 하나의 요소로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정복하는 용기다.”(폴 틸리히) 이념은 반대다. 이념은 의심하지 않는, 의심을 용납하지 않는, 의심이 끼어들 틈이 없는,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투철한, 무분별한 믿음의 체계이다. 이념은 투철한 확신을 가진 광신자들을 만들어내고, 그런 광신자들에 의해 막강해진다.
...우리 안의 존재가 우리에게 그처럼 낯선 것은 우리가 그만큼 많기 때문이고, 확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고, 우리가 우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 말을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 수없이 자주, 이렇게 저렇게 표현을 바꿔가며, 거의 필사적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끈질기게 한다....나는 나의 내면으로부터 뿜어져나오려고 하는 것, 바로 그것을 실현하며 살고 싶었을 뿐이다. ...모든 인간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길이다.
...시인 최승자는, 썩지 않으려면 다르게 기도하는 법, 다르게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충고한다. “절대로 달관하지 말 것/ 절대로 도통하지 말 것”. 앙드레 지드는 익숙한 세계에 안주하지 말라고 권유한다. “그대를 닮은 것 옆에 머물지 말라. 결코 ‘머물지 말라’, 나타나엘. 주위가 그대와 흡사하게 되면, 또는 그대가 주위를 닮게 되면 거기에는 이미 그대에게 이로울 만한 것이 없다. 그곳을 떠나야만 한다˝
...걸으면 다리에 근육이 만들어지고, 근육이 만들어지면 걷는 데 유리하다. 다리를 움직여 걷는 것이 근육을 만드는 방법이 되는 셈이다. 걷기와 근육 생성은 서로에게 원인이고 결과다. 그러나 근육을 만들기 위해 걷는 것은 아니다. 결과적 현상을 목적과 혼동할 필요가 없다.
언제까지 걸을 거라고 미리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을까. 걸을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걸을 수 없는 순간이 올 때까지 걸으면 된다.
북플에서 작성한 글은 북플 및 PC서재에서만 수정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