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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주님의 서재
  •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 홍한별
  • 18,000원 (10%1,000)
  • 2025-02-15
  • : 22,640
...이슈메일은 흰색이 주는 섬뜩한 공포감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 한다. “무서운 절멸감으로 우리의 등을 찌르는 것은 그 색깔의 막연한 불확정성이 아닐까? 흰색은 본질적으로 색깔이라기보다 눈에 보이는 색깔이 없는 상태인 동시에 모든 색깔이 응집된 상태가 아닐까? 넓은 설경이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공백이지만 그렇게 의미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까?”...흰 고래는 모든 것을 표상하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는 공허다. 멜빌은 이 흰 고래를 그리려고, 연필 선을 더해 흰 고래를 그리는 대신 흰 고래를 제외한 모든 것을 그렸다. 그렇게 글자들을 새카맣게 포개어 그리고 남은 중앙의 빈 공간, 흰 여백이 바로 흰 고래다.




...번역이 배신인 까닭은, 혼란스러운 언어를, 부유하는 기의를 일시적으로나마 고정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번역은 끝없이 변화하는 언어를 한순간이라도 고정하려고 애쓰는 덧없지만 불가피한 시도다. 무수한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것들은—대부분—저버리는 일이다. 누구나 알듯이 어떤 번역도 원문을 있는 그대로 거울에 비추듯 재현하지 못한다.



...식민 권력은 성경을 토착어로 번역해 서구의 종교와 세계관을 식민지인에게 전파하는 것에서 시작해, 지배자의 언어로 원주민의 설화와 역사 등을 번역해 원주민 문화를 연구하고 통제했다. 이렇게 언어적·문화적 침투가 이루어진 후에 실용적·통치적 필요에 따라 지배자의 언어를 강요하기도 했다. 그렇게 식민지인들은 언어와 문화적 정체성을 잃고 자신을 드러낼 목소리를 잃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우리도 직접경험으로 아는 일이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일제가 한국어 사용을 금지하여 우리의 정체성과 문화를 파괴하는 잔인한 식민지 정책을 펼치면서 우리말도 커다란 위기를 겪었다.




...데버라 스미스는 The Vegetarian 번역에 관한 변에서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은 모호성, 반복, 평범한 문체를 더 잘 수용하는 언어에서 정밀성, 간결함, 서정성을 선호하는 언어로 옮겨가는 과정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모호성, 반복, 평범한 문체가 한국어의 특징이라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한강의 문장에 서정성을 추가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도 물론 동의하지 않는다). 적어도 한국어의 정밀성이 영어에 못 미친다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모호성은 원문에 있었던 게 아니라 데버라 스미스의 머릿속에 있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스미스가 번역문에 전사한 모호성, 불분명함이 한국어를 모르는 독자들에게 동양의 낯선 신비로 여겨진 건 아닐까.




...번역은 원본이 그 자체로 완결성과 근원성을 지닌다는 신화를 무너뜨린다. 번역은, 이종교배는, 혼종은 원본을 변형하고, 아버지를 살해하고, 혹은 아버지를 삼키고, 거기에 내 모습을 입히고, 내 것으로 만들고, ‘최초 장면’의 트라우마를 길들인다. 그렇게 식민지에서 우리가 계속 번역을 하며 다른 세상을 꿈꾸었기 때문에 오게 된 곳이 이곳일지 모른다.





...사람의 언어는 명징하지 않다. 사람의 언어는 텍스트뿐 아니라 여백을 통해서도 말한다. 사람의 언어는 표면이 우그러진 거울이고 흐릿한 유리창이다. 사람의 번역도 그렇다. 『괴델, 에셔, 바흐』의 저자 더글러스 호프스태터는 “생각을 표현하는 것은 언제나 왜곡이다. 언어는 엉성한 근사치이거나 단순화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다시 표현하는 것 [번역] 역시 언제나 왜곡이지만, 두 번째 왜곡이 첫 번째 왜곡 [원문] 보다 덜 충실할 것도 없다”라고 말한다.



...AI는 어떤 게 더 좋거나 나쁜지 판단하는 게 아니라 통계를 따르므로 가장 좋은 번역이 나오는 게 아니라 여러 번역가가 내놓을 법한 번역의 평균치에 가까운 결과물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평균적인 번역은 잘한 번역이 아니다. 무난한 번역일 뿐이다. 번역의 탁월함은, 우리의 습관과 관성을 떨쳐버릴 때, 가장 많은 사람이 가는 평범하고 빤한 길을 벗어날 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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