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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주님의 서재
  • 나무
  • 고다 아야
  • 15,120원 (10%840)
  • 2024-12-20
  • : 28,795

...저 오래된 나무는 그냥 죽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새로 자란 나무도 그냥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생사의 경계, 윤회의 무참함을 봤다고 해서 그렇게 집착할 필요는 없다. 죽음의 순간은 찰나다. 죽은 후에도 이처럼 온기를 품을 수 있다면 그걸로 괜찮다. 이 현장을 못 보고 지나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이 온기를 남은 생의 선물이라 믿으며 살아가야겠다고 결심하자 눈이 촉촉해졌다. 나무란 이처럼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다. 이다음에는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야 나무가 숨긴 감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아무도 없고, 해와 꽃과 등에와 물뿐이었다. 등에가 날갯짓하는 소리와 꽃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그 밖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멍하니’라고 해야 할지, ‘넋을 잃고’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버지 옆에 말없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포화(飽和)라는 말이 그런 상태를 가리키는 걸까 하고 나중에 생각해본 적 있다. 특별히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등꽃을 보고 있었을 뿐인데 어째서 그토록 넋을 잃고 바라보게 된 것인지 이상하다...그러나 훨씬 훗날에 아버지가 등꽃에 관해 쓴 수필을 읽고 깜짝 놀랐다. 등꽃은 가을에 피는 꽃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등에 소리는 천지의 활기를 말해준다, 이 꽃을 보면 내 마음은 하늘에도 닿지 않고 땅에도 닿지 않는 공중을 떠돌며,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고 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경계를 유람한다고 쓰여 있었다.




...아이는 등꽃을 골랐다, 그런데 왜 안 사준 것이냐, 돈이 부족하면 지갑을 통째로 계약금으로 걸면 끝날 일을 너는 아비가 한 말도 자식이 어렵게 내린 선택도 헛수고로 만들어놓고 태평하게 있으니 그 얼마나 천박한 심성이냐, 게다가 등꽃이 터무니없이 비싸다고 했는데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가치를 정하는 것이냐, 다소 값이 비싸다 해도 그 등꽃을 아이의 마음을 살찌울 거름으로 삼아줘야겠다는 생각은 왜 하지 못하는 것이냐, 등꽃을 계기로 어느 꽃이든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면 그것은 아이의 일생에 마음의 여유가 될 것이고 여자 일생에 눈의 즐거움이 될 것이다, 만약 더 깊은 인연이 있다면 아이는 등꽃에서 담쟁이덩굴로, 담쟁이덩굴에서 단풍으로, 소나무에서 삼나무로 관심의 싹을 키워나갈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이제 그 아이의 재산이 된 셈이다, 그 이상의 가치는 없다, 한창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어떻게 하면 아이의 몸과 마음에 훌륭한 양분을 줄 수 있을지 그것만 생각하는 법이다. 금전을 먼저 들먹여 아이 마음의 영양을 생각하지 않는 처사에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온다며 몹시 꾸중했다.




“비스듬히 서 있는 나무는 형일까요? 동생으로 보이나요? 형제든 친구든 한때 이 두 나무는 경쟁했을 겁니다. 그러다가 어떤 이유로 한쪽이 공간을 양보하게 되었고 그 상태로 지금에 이르렀을 겁니다. 똑바로 서 있는 나무를 감싸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참 불쌍하죠? 서로 이웃해 자라는 나무에게서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평생 한쪽으로 기운 채 살아갈 편백나무의 높은 우듬지에 무성하게 달린 가느다란 잎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 작은 흔들림에도 기울어진 구간 어딘가는 인내를 요구받고 균형을 잡으려 애쓰고 있을 것이다. 나무는 말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 몸이 기울어도 아무 말 하지 않는다.






...나무란 겉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고쳐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고, 동시에 나무는 한번 상처를 입으면 평생 그 상처의 고통을 몸속에 품은 채 살아간다는 것이 된다. 나무는 성장이 중심부가 아니라, 항상 바깥쪽에서 바깥쪽으로 새로운 나이테를 만들어가며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배운 곳도 여기다. 바깥쪽에서 바깥쪽으로 새로운 나이테를 만들어가기 때문에 상처도, 그 상처가 일으킨 변형도 세월과 함께 안쪽 깊숙이 감싸안는다. 감싸안는다는 말은 따뜻한 정을 내포하는 표현이다. 알맹이를 보살피고 보호하고 외부의 재난을 막아주는 역할을 겸하는 행위가 바로 감싸안는다는 말이다. 생물은 인간도 새도 짐승도 모두 그 상처를 감싸안아야 할 필요가 있다. 나무도 당연히 그렇게 한다. 감싸안고, 보호해주고, 변형을 보완해주고, 되도록 상처 없는 나무와 마찬가지로 줄기를 원통형으로 만들어가려 한다. 굽은 나무가 비전문가의 눈에 얼핏 매끈한 피부를 보여주고 우수한 목재와 비교해 눈에 띄는 차이가 없어 보이는 이유는 사람을 속이려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이치에 따른 것으로 여겨진다.




...잔뿌리는 나무라는 구조의 말단이지만, 구조의 말단은 온 힘과 노력을 쏟고 있다. 인간에게 짓밟혀 껍질이 빨갛게 벗겨진 상태로 비에 젖은 투망형 뿌리를 보다가 나무는 평생 거주지를 바꾸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난 곳에서 죽을 때까지 한자리에서 살아가겠노라는 의지가 가장 강한 존재는 뿌리임이 틀림없다....보통 뿌리와 나무의 경계를 정하는 것은 흙이다. 흙 위로 솟아 나온 부분부터 나무가 된다. 뿌리와 나무는 본래 하나로 이어져 있다. 그런데 거기에 경계를 짓는 것이 작고 부슬부슬한 흙 알갱이라서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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