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내내 괴로웠다. 내가 폭설이 내리고 바람 부는 제주 중산간에 있는 외딴집에 갇혀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소설은 돌봄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왜 그렇게 답답했을까. 내게 돌봄은 답답함을 느끼게 하는 걸까.
더이상 돌볼 가족도, 일을 할 직장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13)
<작별하지 않는다>는 돌보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화자인 경하가 자신에게 할당된 돌봄 역할이 끝난 후 죽음을 준비하면서 내 죽음 뒤의 뒤처리를 차마 부탁하지 못하고 죽지 못해 결국 스스로 돌봐야만 하는 이야기이고, 경하와 인선이 서로를 돌보는 이야기이다. 경하는 인선이 아끼는 새를 구하기 위해 험난한 길을 나서고 인선은 경하를 계속 생각하며 돌봐왔다. 그러기에 인선은 경하에게 새를 구해달라고 어려운 부탁을 한다. 또 인선이 눈처럼 가벼운 새를 돌보며 자신을 돌보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때 알았다. 인선이 줄곧 나를 생각해왔다는 것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약속했던 프로젝트를,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사 년 전 내가 꾼 꿈속의 검은 나무들을, 그 꿈의 근원이었던 그 책을. (57)
또 이 소설은 인선 어머니가 인선을 돌보고, 인선이 어머니를 돌보는 이야기다. 인선 어머니는 동생을 돌보고 동생의 행방이 묘연해진 후에는 그의 흔적을 쫓으며 계속 동생을 돌본다. 동생이 ‘언니들이 저를 구해줄 거라’ 생각했을 거로 생각하기 때문에. 인선 어머니는 인선 아버지를 돌보고 밥도 잘 먹으며, 실톱을 깔고 누우며 새들처럼 버티다 불현듯 횃대에서 툭 떨어진 거 아닐까. 필사적으로 버티다 퓨즈가 끊어지듯이. 필사적(必死的)이란 말은 쓰고 보니 죽음을 아우르는 말이었다. 돌봄을 받는 사람들이 돌보는 사람에게 천적은 아니지만 괜찮은 척 버텨내야 하는 건 똑같다. 그게 ‘사랑이 무서운 고통’이라는 뜻 아닐까.
건강해 보여도 방심할 수 없어. 아무리 아파도 새들은 아무렇지 않은 척 횃대에 앉아 있대. 포식자들에게 표적이 되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견디는 거야. 그러다 횃대에서 떨어지면 이미 늦은 거래(112)
아주 다르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다르지만은 않은 작은아버지의 이미지도 겹쳐진다. 6.25 한국 전쟁에 나가 돌아오지 못하고 뼈도 못 찾은 형의 유골을 찾아 국방부 유해 발굴 감식단에 여러 번 다녀오던 작은아버지. 매년 현충일 즈음이면 작은아버지와 찾던 묘지도 없던 국립묘지 분향소. 내년이면 구순인 작은아버지는 인지 저하를 겪는 중에도 국방부에 다녀오곤 했다. 작은아버지의 마음이 인선 어머니의 마음과 같은 것이었음을 이제 알겠다. 동생의 흔적을 찾아 헤매고 남편과 딸을 돌보다 분열증에 시달리고, 치매로 생을 마감하는 인선 어머니의 삶이 작은아버지와 겹쳐져 눈처럼, 물처럼 흩날리고 섞인다.
‘4.3’에 대해서 그동안 모르진 않았다. 오래전 소설가 현기영의 <순이 삼촌>을 읽었었고, 고구마를 한동안 못 먹었다. 2013년에 나왔던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도 영화관에서 봤는데, 눈발 날리는 추운 겨울 밖에서 발가벗고 벌을 받는 군인이 안쓰러워 자꾸 생각났다. 읽고 보는 것만으로 힘겨웠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내야만, 함께 시간을 겪어내며 돌봐야 하는 삶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울까.
어느 날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눈 결정을 관찰한 적이 있다. 그냥 눈으로 보기에도, 아마 지금보다는 시력이 훨씬 좋았을 때였겠지, 정말 그림처럼 정교했다. 눈은 가볍지만, 또 얼마나 무거운가. 두껍게 쌓인 눈은 나뭇가지를 꺾고 지붕이 무너진다. 인선과 경하의 삶, 이렇게 오래 생각을 돌보며 글을 쓰고,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며 그 힘듦을 견뎌내야 한다는 건 얼마나 무거운 일일까. 약한 사람들을 돌보는 건 그들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것이고, 시간을 함께하는 일이며, 약함은 작가 말대로 ‘제대로 들여다볼수록 더 고통스럽다’(49).
돌봄이 끝나면 내게 남는 것이 무엇일까. 돌봄이 힘겹다고 답답해하지만 돌봄이 끝날 때 사는 것도 끝이리라. 그렇게 돌봄이 계속되어야 할 이유는 살아야 할 이유가 되고 새에게 물을 먹여야 하는 이유가 된다. 서로 돌보는 ‘지극한 사랑 이야기’로 이렇게 한 해를 매듭짓는다.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