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사랑스러운, 다정한 소설들을 읽는 내내 암담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한편 재미난 이야기를 읽는 내내 즐거웠다. 수백 년 세월이 흘러도, 가까운 미래의 우주 정거장에서 우주 비행을 마음대로 하는 세상이어도 사람들이 하는 걱정과 불안은 지금과 똑같고, 물성을 가진 인간은 태어나고 죽을 것이다. 사람들을 배제하고 편견에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이 때문에 소수자들을 고통과 외로움에 빠지게 하는 것은 지금과 같을 것이다. “아무리 가속하더라도, 빛의 속도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한참을 가도 그녀가 가고자 했던 곳에는 닿지 못할 것이다”라며 표제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 작가가 이야기하듯이. 아무리 지금보다 과학기술이 발전하더라도 우리는 인간으로서 상상하고 만나고 기대하고 실망하며 살아갈 것이다. 동물과 대화하는 것을 상상하더라도 동물을 의인화해서 사람을 기준으로 생각하듯이, <공생가설>에서처럼 아기들이 어른과 다른 사고를 한다는 것도 어쩌면 어른들의 위계에 따른 생각 아닐까.
작가는 <관내분실>에서도 너무 귀여운 상상력을 보여준다. 우리의 기억이 뇌의 서랍에 고이 접혀져 있다 어느 순간 활성화되는 것처럼 (계속 개켜져있는 기억도 많다) 도서관에서 대출할 수 있는 죽은 사람의 마인드, 망자의 영혼이라니. 그럴 수 있다면 40여 년 전 돌아가신 엄마도 만날 수 있을까. 마인드 업로딩이 된다면 사람들은 아마 죽어서도 싸우고 갈등하고 있을 것이다. 죽은 사람의 마인드와 접속해서 “나에게 왜 그랬냐?” 따지고 확인하려 했을 걸 생각하면 죽어서도 쉼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다다르고 스스로 소거되는 것을 원한 엄마의 선택이 이해된다.내 삶의 흔적들을 검색하면 나오는 결과물은 무얼까. 다시 세상에 소환되는 걸 엄마가 원했을까? “엄마가 하나도 없어”로 흔적도 안 남는 걸 엄마도 원한 것 아닐까. 엄마에 대해서 모르는 게 너무 많다며 엄마의 흔적을 검색하는 건 한 번도 엄마를 이해해보려 하지 않았던 자신의 안타까움을 씻어내려는 딸의 욕망 아닐까. 의미 있는 흔적이라는 건 뭘까. 세상에서 성공적으로 30여년 넘게 이름을 가지고 살았어도 은퇴하는 순간 삭제되고 마는데, 아니 어쩌면 이렇게 숨고 싶었는지 모르겠는데. 우리가 타인에 대해서 안다는 건 뭘까. 얼마 전 오랜 친구는 내가 과거 자신의 직업적 경력을 잘 기억하고 있지 못했다는 이유로 도대체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게 뭐냐고 아쉬워했다. 과거 자신의 직업적 경력을 잘 기억하지 못한 것이 그렇게 커다란 상처였을까? 나는 그와 함께 지난 가을 걷던 도시의 하늘빛과 호수의 물결을 기억하는 것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했는데.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다 깨달았다. 그의 직업적 경력을 내심 무시하고 있었음을. 우리가 나 아닌 타인을 진정 이해할 수 있기는 한 걸까. 서로에게 가 닿을 수 있을까. 이렇게 서로 다른 행성으로 떠돌던가, 심해에서 웅크리고 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