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암투병중일 때 문병 온 목사는 어린 아이들을 생각해 엄마를 하늘나라에 데려가지 말라고 기도했다. 이후 임종예배에서는 착한 사람은 하늘에서 먼저 데려가 하느님 곁에 두신다고 말했다. 그 때부터 이상했다. 어린 마음에도 이해되지 않았다. 말이 되지 않았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사회초년생이었을 때 무슨 동기에서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내발로 걸어가 성당에서 6개월 교육 끝에 영세를 받았다. 내가 죄인이라는 말에 절절히 공명했었던 기억만 남아있다. 몇 년 다닌 후 소위 냉담자가 되었다. 이후 하느님은 안 계신다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까라마조프씨네 3형제 중 막내 알료사의 말이 들려온다. “논리이전에 사랑해야 해요. 반드시 논리이전이라야만 그 의미를 깨닫게 되죠.” 이치에 맞아야 이해가 되었다. 그저 믿으라는 건 내겐 사기처럼 들렸다. 욕심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사기당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욕심이 많아서 당하는 거라고 얼마나 당당하게 말하고 다녔는지. 어떻게 말이 되지 않는데 그저 믿나? 내게 말은 논리였고 이해였다. 당연히 보이지도 않는 신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신은 사람들이 편의에 따라 만들고 믿는 것이었다. 反기독교 성향의 책들을 읽으며 생각은 더 견고해졌다.
내가 도둑질을 한 것도 아니고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닌데 맨날 내가 죄인이라는 게 납득되지 않았다. 도대체 저 사람들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매일 죄인이라고 자학하는 걸까. 내가 보기에 진짜 죄인들은 떳떳하고 당당하게 잘 먹고 잘 살면서 돌아다니는데 약한 사람들은 죄인이라며 머리를 조아렸다. 많이 보지 않는가. 장애인 학교 만들어 달라고 장애아를 둔 게 죄라서 엄마들이 무릎 꿇고 빌지 않는가. 그런데 까라마조프가네 형제들의 성자 조시마 장로가 부드럽게 말한다. “오랫동안 죄를 짓지 않은 사람으로서 악당들에게 빛을 비춰줄 수 있었는데도 빛을 비춰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행동하지 않았으므로, 실천하지 않았으므로 죄인이라고. 오랫동안 죄를 지어왔음을, 내가 죄인인 것이 절절히 이해되었다. 미쨔가 아버지를 죽일 마음이 있었음을 고백할 때 나도 그러했었음을. 죄는 내가 나쁜 일을 저질러서 짓는 것이 아니라 빛을 비춰주지 않은 방관이었다. 어두운 밤길 산행을 나섰을 때 나 혼자 손전등이 있다면 함께 걷는 친구의 발밑에 불빛을 비춰주는 것. 모르는 사람이라도 불빛을 나누는 게 사람 사는 도리일 것. 미투 국면이후에도 안희정 사건의 피해자가 대통령부인이 되려는 목적으로 저지른 일이라는 동네 언니들 모임에서 누군가의 발언에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분명 2차 피해였음에도 ‘평화로운 만족’을 깨뜨리기 싫은 게으름으로 발언수위가 위험해지는 남자들에게 확실한 경고를 날리지 못한 죄가 작지 않다. 이런 게으름이 모여 방관하게 되고 지나치게 되고 그렇게 세상에 악취를 풍겨왔겠지. 오랫동안 죄를 지었다. 평화를 갈구하며 안정에 만족하면서.
까라마조프가의 장남 미쨔는 아버지 표도르를 죽이지 않았지만 죽이고 싶었기 때문에 죄의식을 느끼고 재판과 유형을 받아들이며 자신이 가장 비열한 인간이었음을 고백한다. “내가 형벌을 받으려는 것은 아버지를 죽였기 때문이 아니라 죽이고 싶었기 때문이며, 어쩌면 정말로 죽이는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고쳐먹겠다고 맹세했지만 매일 똑같은 짓을 반복하며 말하고 게을렀던 죄를, 아버지를 죽일 마음을 실제 가졌었음을. 마음속으로 짓는 죄는 내 良心(좋은 마음)에 거리낌이 들 때, 자기 잘못을 스스로 깨닫는 순간 마음에 스크래치가 생길 때 스스로 안다. 아들이 아버지를 때리고, 죽이고 싶어 하는 마음을 먹고, 내가 세상에 지은 죄의 총합으로 이 세상이 얼마나 위험해졌으며 서로 아귀가 되어 눈물 흘리는 지옥이 되었는지, 아버지를 죽인 혐의로 증인신문이 끝나고 깜빡 잠이 든 미쨔는 꿈을 꾼다. 처절한 풍경이다. 불탄 기둥 옆에 흙빛 얼굴을 하고 있는 부인들과 슬프게 울어대는 갓난애들을 보면서 미쨔는 미친 듯이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왜? 그러면서 미쨔는 깨닫는다. 내가 저지른 죄는 즐겁게 노래 부르지 않은 죄요, 그저 엉거주춤, 우유부단 하느라 입으로만 떠버리고 실천하지 않은 죄라고, 아귀들에게 젖을 주지 않은 죄요, 서로 안아주고 입맞춤해야 했음을. 드미트리는 단순하지만 복잡하다. 고결할 수도 비열할 수도 있는 순간에 행동으로 선택한다. 이 지옥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음을 깨달으며 헛된 불평과 거짓만 일삼아왔음을. 불행을 받아들이고 감당하는 자, 드미트리가 계속 성장하는 이유다.
이반도 ‘하지 않음’의 죄를 저질렀다. ‘죽이지는 않았어도 미쨔처럼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내심 아버지가 죽으면 아버지의 유산을 동생과 나눌 수 있음을 생각해봤을 수도 있다. 아버지를 죽인 사람은 형이어도 좋고 스메르쟈코프여도 좋다. 나만 아니면 되. 그렇게 자신의 아버지가 죽도록 방조하고 스메르쟈코프가 행동에 나서도록 부추기고 자리를 피하고 침묵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세상바깥으로 도피한 자신의 사상에 맞추어. 스메르쟈코프가 비아냥거린다. “도련님은 무엇보다도 평화로운 만족 속에서 사는 걸 좋아하시죠. 누구에게도 머리를 숙이지 않는 생활 말입니다” 적확한 펀치에 얼얼하다. 이반은 인간이 신을 고안해냈다고 하면서 신을 인정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지성은 유클리드적인 지상의 것인데 어떻게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을 해결할 수 있겠냐고. 다 인정한다고 쿨 한척 하면서 신의 세계는 인정하지 않는다고. 신이 창조한 세계가 너무 비참해서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세상에 깃들어 살고 있으면서 세상의 바깥에 있겠다는 선언이다. 눈으로 보아도 믿지 않으면서 관조자로 살겠다는 것. 이반은 신도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살고 싶다고 삶을 사랑하고 구원받고 싶다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가까운 가족, 지인들에게 빛을 비추지 못하면서 어떻게 먼 곳에 있는 인류를 사랑할 수 있을까. 얼마나 공허한 말장난인지. 분열적인 말과 생각은 이반에게 분열증을 가져다주었다.
우리들이 저지르는 죄들은 대부분 무지와 사소한 게으름에서 비롯된다. 누구를 죽이거나 강도짓 등 큰 죄를 짓지 않아도, 큰 죄를 짓지 않았으니 죄인이 아니라는 말, 내가 바람을 피웠나, 돈을 안 벌어다 주었나 큰 소리 치는 남편들의 무지와 게으름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집안일 하지 않음을 무마하려는 작고도 큰 죄. 작은 무지와 사소한 게으름이 죄의 씨앗인 것을. 까라마조프가네 형제들 읽으면서 초반에는 이반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방금 한말을 이어진 말에서 뒤집는 이반의 정신 상태에 내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이반이 논리적이라는 촌평이 이해되지 않았다. 차라리 헛된 기대, 근거 없는 자신감에 휩싸여있는 드미트리에게 감정을 이입했다. 이야기의 후반부에 와서 내가 이반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내 행위를 감당하고 책임지기보다 머리로만 세상을 판단해 방관자로 게으르게 살아왔음을.
조시마 장로는 말한다. 실천하라고, 쉬지 말고 일하라고, 기도하라고. 즐거움을 달라고 부탁하고, 사랑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그럼으로써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라고. 지금 구원되지 않았다면 나중에 구원되리라는 사실을 믿으라고. 사람들은 절대 심판자가 될 수 없음을 특히 기억하라고. 이반의 무신론은 가깝고 조시마 장로의 구원론은 멀고 아득하다. 신이 있고 없는 게 중요하지 않은 것 아닐까. 보이지 않는 것을 증명하라고 요구하기보다 그저 인간의 나약함과 비천함을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 불행하고 비참한 세상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닐까. ‘하지 않음’의 죄를 ‘함’으로 구원받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