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느지막이 도봉산 무수골로 향한다. 다른 계획을 잡기 어려울 때 가곤 하던 곳이다. 지난번 내린 봄비로 무수천 물도 물소리도 깨끔하다. 숲으로 깊이 들어가기 전에 어귀 밤나무집 가서 점심 식사부터 한다. 새콤하니 익은 열무김치 곁들여 잔치국수를 먹는 중에 바깥일 하던 여주인이 들어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뜻밖의 말을 듣는다.
여기서 태어나 60년 가까이 살았으나 골짜기 이름을 무수골이라고 부른 적이 없단다. 심지어 보문사 계곡이란 말은 처음 듣는단다. 토박이들은 골 위쪽을 ‘밤나무골’이라 부르고 아래쪽을 ‘굿골’이라 불렀단다. 물론 밤나무와 무속인이 많아서 생긴 이름이다. 실현 가능성이 작으나 한자로 표기한 관료식 이름을 모두 본디 모습으로 되돌려 놓았으면 좋겠다.
도봉산이라는 이름도 마찬가지다. 신라시대 창건된 도봉사라는 절에서 왔다는 설이나 조선 개국과 관련해 도봉산이 됐다는 설은 모두 지배층 중심 사후 서사다. 도봉에서 ‘도’는 ‘돌’에서 왔다고 본다. 자운봉을 비롯해 그 주위 암벽들이 지니는 압도적 위상서껀 이어지는 오봉·포대·다락 암릉(巖稜) 길을 가리키는 우리말 이름이 모름지기 엄존했을 테니까.
특정 목적에 따라 작위로 지은 이름과 달리 민중 입에서 입으로 전해온 이름은 무작위 소산이다. 인간으로서 산, 물, 들과 상호작용 하며 살아가는 맥락에 딱 알맞은 표상을 누구랄 수조차 없이, 너나 함께 입에 올려서, 사실상 자연발생 한 이름이다. 이 이름은 시원에 닿은 평등과 자유 팡이시질(networking) 영성을 머금고 있다. 되살려야 할 며리다.

길 잃고 헤매기 직전에 담았다고 추정하는 숲 풍경

밤나무골 길을 찾은 뒤 처음 담은 물 풍경
식사가 끝나갈 무렵 여주인이 허리 아픈 이야기를 한다. 먹다 말고 나는 침을 꺼내 든다. 침 치료를 받은 그가 고마움을 표하며 전을 부쳐준다. 맛나게 먹고 길을 나선다. 지도에서 확인한바 다른 길과 이어지지 않고 끊어진 비탈길로 들어선다. 길 잃기로 작정한다. 마침내 어디선지 알 수 없이 길을 잃고 ‘무작위’로 헤맨다. 숲에 왜 드는지 알고야 말리.
어떻게 해서 밤나무골 길을 찾아 들어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의미 있는 지점을 사진으로 남기지도 않은 걸 보니 넋을 놓은 상태로 떠돌았음에 틀림없다. 정신 차리고 담아 놓은 물 사진이 서른 장 가까이 된다. 밤나무골 물 모심은 제대로 한 듯하다. 새로운, 아니, 본디 이름을 찾아 다시 부를 일 없는 이름 ‘무수골’은 이제 어떤 격상을 앞두고 있다.
실은 몇 주 전부터 해월(海月) 스승 유택이 있는 원적산을 탐색해 왔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숲에 드는 게 맞는지 스스로 다시 물었다. 기나긴 여정 뒤라 뜬금없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뭔가 확실히 비어 있다고 느껴서 끈덕지게 물었다. 원적산을 보류하고 위험성이 덜한 밤나무골 어디선가 길 잃기로 돌렸다. 숲이 어떤 슬기를 줄는지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