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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리·버들 글숲


 

특별한 이유 없이 여느 날과 달리 하루가 돌아가는 날이 있기 마련이다. 오늘은 이상하게 한두 걸음씩 더디 마디를 맺어간다. 오전 느지막이 교보 가서 책 한 권 짊어지고 점심으로 국밥 한 그릇 먹는다. 광화문 광장에서 백악을 바라보며 그냥 직진한다. 작정 없이 경복궁으로 들어가 인파와 길을 나누며 뒤섞인다. 어제 유산과 오늘 계절을 사진으로 품는다. 천천히 나아가 신무문을 지난다. 청와대 앞길에 서니 “광장의 빛으로 다시 청와대”라는 글귀가 바람에 나부낀다.

 

무슨 말인지 모른다면 시민 아닌 신민이다. 시민을 영원한 신민으로 만들려고 명신이 떼거리가 저지른 패악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파란 천에 써놓은 하얀 글귀가 지난 3년 반 시간을 압축한다. 전방위로 우리 사회를 구겨놓은 사악하고 천박한 주술은 다만 백악 머리가 돌아앉았으니 들어가면 죽으리라 따위에서 그치지 않았다. 왜놈 제국이 창경궁 희화한 짓을 본받아 청와대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훼손했다. 그 정도가 너무나도 심각해 이재명 대통령 복귀가 지연되고 있다.

 

청와대 그 모양으로 만들어 놓고 들어간 용산은 왜놈 제국이 황군 주둔지로 삼으면서 본디 용산을 강탈해 끌어다 붙인 가짜 용산이다. 그 전에 청군도 그 후에 미군도 여기를 점령했던 내력 깊은 제국 물리력 소굴이다. 처음부턴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아우라를 품고 들어갔음은 분명하다. 내란 재판 과정에서 드러났듯 저들이 꾸민 절대 왕국 건설 청사진은 실로 방자하다. 명성황후 침전까지 범한 사실에 이르면 그 기괴한 과대망상을 필설로 형언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주술로 흥해 주술로 망한 명신이네 이야기를 다만 ‘씹고 버리는’ 가십 정도로 치부하면 안 된다. 저들이 특히 참람하고 멍청했을 뿐 세상을 주무르는 모든 지배층은 중대한 일일수록 주술에 의존한다. 이 진리를 바탕으로 정치·경제와 사회·역사를 논하지 않으면 과학주의라는 또 다른 주술에 걸려버린다. 서사 구성 능력을 지닌 좌뇌를 쓰는 한, 주술은 인류에게 불가피한 함정임과 동시에 솔루션이다. 이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사유와 실천 패러다임이어야만 제국을 궤멸시킨다.


 

청와대를 지나 삼청동길을 걸어 백악으로 들어간다. 여태까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택해 말바위 전망대로 올라간다. 한양 동쪽 반을 조감한 뒤 도성을 따라 내려오다 다시 처음 가는 길로 무작정 들어선다. 말로만 들은 와룡공원이 나온다. 거기서도 숲길이 굽이진 외진 곳으로 들어간다. 숲 끄트머리에 이르러서야 지도로 마지막 방향을 확인한다. 명륜3가 비탈길을 내려온다. 오랜 풍화작용이 서린 골목이다. 이 낯선 마을에서 내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다니, 喝.

 

대학로로 나와 김상옥 의사 동상 앞으로 간다. 여기서 예를 올림으로써 오늘 일정을 닫으려 해서다. 전에 없던 안내판이 서 있다. 역사 내용 일부 오류를 바로잡고 명칭 비판을 의식한 해명 글을 적어 놓았다. 해명이 변명처럼 들리고 끝내 제가 옳다는 고집으로 읽힌다. 이렇게라도 뭔가 바뀌어 가니 그나마 오늘을 좌절하지 않는다. 내란을 알뜰히 진압하고 자주민주 공화국을 살뜰히 건설하는 그날을 위해 부디 지치지 않고 다 함께 웃으면서 끝까지 간다. 하쿠나마타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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