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정릉은 조선 태조 계비인 신덕왕후를 모신 조선 최초 능이다. 정릉은 본디 중구 정동에 있었다. 부부 사이가 남달랐던 태조는 신덕왕후가 승하하자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능을 사대문 안에 조성하고 수시로 드나들며 애틋함과 그리움을 표했다. 생전에 신덕왕후 정적이었던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곧 정릉을 지금 자리로 옮겨 폐릉(廢陵) 상태로 만들었다. 후대 송시열 상소로 복권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이런 역사를 알고 있었던 나는 정릉에 각별한 애정을 지닌 채 60년 동안 수도 없이 드나들었다. 최근 어떤 글을 읽다가 본디 정릉이 덕수궁 안 어디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실제 장소가 부쩍 궁금해졌다. 다른 자료를 찾아보니 지금 미국대사 관저쯤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직접 거기로 찾아가 보기로 작정했다.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 시간에 덕수궁길을 서로 반대 방향으로 걸어서 두루 살폈다. 마침내 한 장소를 특정했다.
덕수궁 돈덕전과 중명전 사이 미국대사 관저는 덕수궁길을 가로지르는 나지막한 능선 위에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능선 정상에서 남서쪽 아래로 살짝 내려온 곳이다. 그 반대편 북동쪽 아래로 살짝 내려온 곳은 그 방향에서 직선으로 경복궁이 보인다. 이를테면 ‘신덕왕후의 시선’이다. 경복궁에서 서남쪽을 보아 가장 가까운 산 능선 바로 아래 아늑한 영면 터전이 보인다. 이를테면 ‘태조의 시선’이다. 바로 여기가 본디 정릉 자리다.

덕수궁길-고개마루 직전 오른쪽에 돈덕전, 왼쪽에 미국대사 관저가 보인다

신덕왕후의 시선

태조의 시선
태조의 시선을 기준 삼고 광화문을 나서 세종대로를 따라가다가 오른쪽으로 틀어 새문안로로 들어선다. 조금 가다가 왼쪽 덕수궁길로 접어들어 완만한 산길을 오른다. 능선을 넘어가기 직전에 넓고 안온하게 들어앉은 정릉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길이 바로 신덕왕후를 찾아오던 “태조의 길”이다. “태조의 길”은 명성황후를 잃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향했던 “고종의 길”에 상응해 역사가 지닌 절묘한 서사성을 의식하며 내가 붙인 이름이다.

태조의 길

정릉 본디 자리-신덕왕후와 태조가 처음 만난 버들잎 서사를 떠올리게 하는 버드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하필 두 길은 거의 직각을 이루며 맞닿는다. 조선을 일으킨 왕이 왕후를 잃고 걷던 길과 조선을 사실상 무너뜨린 왕이 왕후를 잃고 걷던 길이 이렇게 만난다. 태조의 길은 흥륭(興隆) 시대를 열었고, 고종의 길은 멸망으로 이어졌다. 나는 오늘 태조의 길을 따라 고종의 길을 가로지른다. 토착 왜구들이 다시 한번 나라를 팔아먹으려 총궐기 반란을 일으킨 통렬한 세월을 사는 동안 이 길은 내게 인생 순례길일 수밖에 없다. 오늘이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