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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욱님의 서재
  • 나는 무수히 발원한다
  • 김기정
  • 10,800원 (10%600)
  • 2023-09-20

이 시집은 어제 멈춘 것이 아니라 오늘 새롭게 시작된 자신이 되려면 행해야할 숱한 행위의 이유를 찾아 담고 있는 성찰과 반성, 좌절과 분노, 연민과 희망 등에 관한 기록이다. 시인은 자신이 마주했던 시간을 남기려고 하고 있다. 그것은 희미해지고 있지만, 결코 오늘을 살아가야할 이유가 지워지지 않도록 하려는 노력이며, 절망에 가까운 비관적 태도로 보게 될 것 같아 두려운 마음이 든다고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이 시집은 어제와 오늘의 마음을 언어로써 붙잡아두려는 시도로 읽힌다.


그래도

아름다운 시를 써야한다고

울며 주장하는 일은

더러운 것들을 버리고 싶고,

버려야 하는

얄궂은 희망 때문이다.


- “아름다운 시” 중에서


시에 쓰인 어제에 남은 것들 중에는 지나간 것이 아쉬워 기록으로라도 남겨 추억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 그러나 이미 어제가 되고 있는 오늘에는 스스로 다짐하며 애써 의미를 찾지 않으면 바람과는 정반대로 흘러가는 것들이 적지 않다. 그러한 까닭에 각각의 시들이 다른 대상을 향하고 있을지언정 전체적으로는 무력감이 시집을 관통하는 지배적 정서로 느껴진다.


그러나 무력감은 포기의 이유가 되지는 못하고, 새날과 좋은 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끊어내야 하는 시간 혹은 시대의 정서와 같다. 시들의 화자는 자신의 시간에는 마주 할 수 없는 것일지 모를 현실의 한계를 자각하면서도 현실을 견디고 현재를 살아가야할 이유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집의 중요한 부분을 시대에 대한 관찰과 분석을 담고 있는 몇몇 시들이 채우고 있다. 이 관찰과 분석은 어제를 박제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늘 달리 혹은 더 낫게 살기 위해 시간에 생기를 부여하는 활동으로서 자리하고 있다. 재론컨대 시인은 시를 통하여 이유를 쌓고 있는 것이다.


밀려 걸어도

걸어야 하는

내 발걸음은 내가 안다.

보폭을 줄여 속도를 낮추되

노년의 걸음이 멈춰 서야 할 그곳은

내가 안다.


- “발걸음” 중에서


시집을 읽다보면, 외교유연성, 세력균형, 해양정치와 같이 시에서 자주 보기 힘든 말이 등장한다. 정치과학(political science)이 정치학의 이름이 된 시대라서 국제정치학과 시의 거리가 다소 먼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다만, 시인은 그와 같은 용어를 시의 영역으로 적극적으로 포섭한다. 국제정치학자이기도 한 시인의 삶의 궤적을 그와 같은 언어들이 그렸기 때문일 것이다. 곳곳에 정치학적 문제의식을 담으면서도 정치학자의 일반적 글쓰기가 아니라 시를 선택한 이유는, 어쩌면 오랜 시간 시를 써온 시인의 기록 습관 같은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시가 먼저 찾아왔고, 시에 시인이 살아온 삶이 담기며 그의 시간이 시로 남은 것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 말고도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아마도 시가 아니면 쉽게 남길 수 없는 것들이 있어 시를 선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시에 남은 최소의 말, 말의 호흡, 그것들이 이어져 만들어낼 운율이 마음을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관찰과 분석이 시간에 생기를 부여하는 활동이라고 한다면, 살아있는 기운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사람의 평온과 행복과 같은 것이고, 그것은 마음에 관한 것이다.


세계를 구성하는 숱한 말들 중에는 사람의 평온과 행복 등을 위한 목적에서 탄생한 것들이 적지 않지만, 어느 날부터 그것의 목적과 한참 동떨어져 생기를 잃고 부숭부숭해지고, 또 마음의 자유에 틈을 내어주지 않는 기계적인 것들이 적지 않아 보인다.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시인의 시어들은 언어 속에 비어있는 사람의 마음의 자리를 살펴보게 하는 안내자 역할을 한다.


시인은 모두 마음으로부터 시작해,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마음으로 마침표를 찍는 삶과 시대의 여정 속에서 찬바람이 불고 가로등마저 위태로운 시간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야할 이유를 찾기 위해서 숱한 마음을 시를 통해서 남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느 배우가 수상소감을 하며 “중꺾그마”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중요한 것은 꺾여도 그냥 하는 마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삶의 숱한 순간들은 꺾임의 장면으로 되어 있고, 그 장면 속 자신은 꺾여서 스러지는 경우가 많다. 꺾여서 멈추면, 바라던 내일은 오지 않는다. 꺾여서 시들어버리지 않으려면, 밖으로 꺼내놓기에 주저하게 되더라도 희망 등과 같은 이유가 필요하다. 이 시집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려는 이유를 찾고, 쌓으려는 사람들에게 얼마만큼의 위안, 약간의 용기를 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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