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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의 이야기
  • 미아키 스가루
  • 10,800원 (10%600)
  • 2019-05-29
  • : 1,122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좋았던 기억은 사람을 기쁘게 해주기도, 위안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우울과 상실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소설은 그런 기억으로 시작된다.

 주인공 아마가이 치히로는 의억에 사로잡혀 제대로 자식을 돌보지 않는 부모 밑에서 자란다. 그들에게는 가공의 반려자들이 있었고, 가공의 자식들이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이름을 잘못 부르기 쉽상이었고 어머니는 아들 치히로의 이름을 잘못 부르곤 했다. 둘은 현실의 관계에서 도피한 채 가공의 기억을 좇아 살았고, 결국 이혼한다. 양육권을 가진 아버지 밑에서 자라게 된 치히로는 그 후 딱 한번 어머니와 마주치지만, 어머니는 복용자의 기억을 없애주는 '레테'로 아들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없앤 후였다. 그것이 치히로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허구에 대한 거부감의 결정적 계기가 된다.

 그는 본래 그의 불행한 어린 시절을 완전히 잊기 위해서 '레테'를 주문하려 했지만 착오가 생겨 청춘 시절에 대한 가공의 기억을 심어주는 '그린그린'이 주문되었고, 잘못 주문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복용한다. 그렇게 아마가이 치히로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소꿉 친구가 생긴다.

 치히로는 가공의 과거에 사로잡힌채 생활을 이어나가고, 그러던 8월, 여름 축제날 인파에 휩쓸려 다다른 신사에서 존재하지 않아야 할 가공의 소꿉 친구와 마주친다.

 미아키 스가루의 전작들에서 이야기의 후반부와 결말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중반부에서 일어나는 주인공의 동기 변화인데, 본작에서는 그것이 극후반부에 놓여져 있다. 다시 말해, 작품의 이야기 진행은 초반부 주인공의 동기, 즉 '가공의 소꿉 친구의 정체'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렇기에 전작들에 조금씩 존재하던 추리적 요소가 본작에서는 더 비중있게 등장하며,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또한, 전작들에 비해 여주인공의 이야기가 더욱 세세해졌다. 미아키의 정식으로 발매된 작품들에선, 몇 작품을 제외하곤 한 챕터 정도 여주인공의 시점으로 쓰인 이야기가 등장한다. 주로 중후반부에 이야기에 반전이 발생하고, 그 반전이 이루어진 이야기를 여주인공이 하는 식인데, 본작에서는 그 분량이 길어지면서 두 주인공에 감정 이입을 하기 쉬워졌다.

 여기서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치히로가 가족의 기억으로 인해 허구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인물인 반면, 도카는 가족의 기억으로 인해 허구를 사랑하게 된 인물이라는 것이다.

 도카에게, 허구는 지병을 가지고 있음에도 가족의 지속적인 관심을 받지 못했던 그녀가 유일하게 기댈 대상이다. 현실에서 그녀는 천식 때문에 가족에게 미움 받고 또래에게 놀림 받으며, 어두운 어린 시절을 보낸다. 성인이 된 이후 드디어 그녀는 천식을 완치하지만 엎친 데 뒤 격으로 청년 알츠하이머에 걸린다. 그러면서 예전 기억들마저 차츰차츰 잊으며 더욱더 '유일하게 그녀의 편'이었던 허구에 매달린다.

 작품에서 기억은 한 사람의 인격이나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치히로의 부모는 전의 기억이 마음에 들지 않아 가공의 기억을 계속 사들였으며, 도카의 부모는 전부터 지속되오던 도카의 천식에 기억들 때문에 그 중요성을 망각한 채 그녀를 내버려둔다. 한편 치히로의 조언자인 에모리는 '추한' 외모로 무시 당했던 학창 시절의 기억 때문에 성형을 하고, 다신 그때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생활을 이어간다.

 치히로는 작중 초반부에 다른 사람의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는 자신을 '실재하지 않는 인간'으로 묘사한다. 즉슨, 치히로에게 있어서, 인간의 실재는 '다른 사람의 기억 속에 남는가, 남지 않는가'로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지 않을 뿐더러, 자신의 기억마저 잊혀가는 도카는 '완전한 제로에 가까운', 다시 말해 완전한 허무에 가까운 인물이다.

 치히로는 작중 이런 말을 한다.



 실재하지 않는 인간이 실재하지 않는 인간을 사랑하게 된다. 이것은 그야말로 완벽한 허무다.

 사랑이란 실재하는 인간끼리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실재하지 않는 치히로와 실재하지 않는 도카의 사랑은 완벽한 허무이며, 둘의 만남은 더욱 운명적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치히로의, 어린 시절부터 허구를 증오해온 마음과 '그린그린'의 복용으로 인해 허구를 사랑하게 된 마음이 서로 대립되면서, 이러한 내적 갈등에 따라 이야기의 양상이 크게 주도된다.

 치히로는 태풍 때문에 쓰러졌던 도카에 관한 걱정에 휩싸여 이제까지 부정했던 허구를 향한 사랑을 드러낸다. 이를 기점으로 치히로는 허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다시금 인정하고 자신의 내적 갈등을 한켠에 놓아둔 채, 그녀와 여름 방학을 보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비 오는 날 정류장에서 이 내적 갈등이 다시 표면으로 올라온다.



  "왜? 진심이 될까 봐 무서워서?"

   "그래, 무서워."



 치밀어 오르는 수많은 말들을 집어삼키고, 나는 단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난, 거짓말이 싫어."

 그녀를 정면에서 응시하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평소와 같이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으려고 애쓰다가, 순간 그녀 안에서 무언가가 무너졌다.

 그녀의 뺨을 따라 흐른 한 줄기 그것은, 아마도 빗물은 아니었을 것이다.

 "난, 거짓말이 좋아."



 그에 따라 허구에 의존적인 도카의 성향과, 허구에 대한 거부감을 떨치지 못하는 치히로 사이의 외적 갈등 또한 고조된다.

 도카가 작품 내에서 계속해서 노력해온 '허무에서 실재로의 승화'는 미아키의 작품 전반에 드러나는 '불행 속에서의 행복'과도 어느 정도 그 맥락을 같이하면서도, 이전에는 다루지 않았던 이야기다. 그런 점이 신선하면서도 미아키 스가루다워서 좋았다.

 미아키의 작품을 보면 항상 마지막에는 '작가의 말'이 등장한다. 그는 '작가의 말'에서 작품을 쓰게 된 계기나, 작품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주제를 말하곤 하는데, 이게 또 공감이 가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책의 은근한 매력 중 하나다. 본작에서는 그 자리를 대신해 에필로그가 붙여진 덕분에, 항상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은 보여주지 않아 묘하게 열린 결말의 느낌을 주던 전작들과는 또다른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


 4년 전 여름, 미아키 스가루라는 작가의 <3일간의 행복>를 읽었다.

 어린 마음에 읽었던 <3일간의 행복>은 너무도 인상깊게 다가왔고, 지금도 가끔씩 꺼내들을 때면 어느새 다시 그 이야기에 푹 빠져있는 나를 발견한다.

 <3일간의 행복>에서 등장하는 언뜻보면 불행인듯 보이는 행복은 내게 작품을 보는 한가지 기준이 되었고, 더 많은 작품들을 접한 지금도 여전하다.

 그 뒤로 나는 미아키 스가루의 작품들을 꾸준히 보는 팬이되었고, 해를 거듭하여 성장하는 그의 필력을 보고 있으면, 다음에는 어떤 작품이 나올지 기대하게 된다.

 본작에 대해 미아키는 '자신이 쓴 작품 중에선 가장 잘 쓰여진 작품'이라고 언급한 만큼, 본작은 전작들의 어떤 점들에서 정점에 거의 도달한 듯한 기분이 든다. 또, 전작들에서 시도하지 않았던 것들을 시도하면서, 미아키 스가루라는 작가의 새로운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어쩌면 훗날 돌이켜보면 <너의 이야기>는 미아키의 분기점이 되는 작품이 될지도 모르겠다.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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