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을 펼쳐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가벼운 제목이었다. <종의 기원을 읽은 척할 수 있는 책>. 나이 일흔을 넘기고 돌아보니, 세상에는 평생 ‘읽은 척’만 하며 넘겨버린 수수한 진실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역시 마찬가지다. 진화론이라는 이름으로, 적자생존이라는 네 글자로 수없이 접했지만, 막상 그 원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한 이가 몇이나 될까. 나 역시 평생을 책과 함께 살아왔다 자부하면서도 다윈의 문장을 직면하기보다는 그저 요약된 지식으로만 그를 소비해 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고생물학자인 사라시나 이사오는 이 책을 통해 아주 명쾌하고 솔직한 제안을 던진다. 고전이란 모름지기 들여다보기엔 너무 무겁고 외면하기엔 찜찜한 법인데, 저자는 진화론의 핵심을 가장 알기 쉽고 흥미롭게 풀어내어 읽는 이의 부담을 덜어준다. 그러나 이 책을 단순히 ‘지식의 요약본’이나 ‘교양인의 겉치레용 가이드북’으로만 치부하기엔 그 안에 담긴 생명의 통찰이 결코 가볍지 않다.

책은 다윈이 <종의 기원>을 써 내려간 시대적 배경부터, 그가 생물 세계를 바라보며 품었던 근본적인 의문들을 하나씩 풀어낸다. 저자의 안내를 따라가다 보면 다윈의 진화론이 단순한 과학적 이론을 넘어 세계관의 대전환이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종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며, 모든 생명은 긴 시간 동안 우연과 환경의 상호작용 속에서 변화해 왔다는 사실. 다윈은 신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창조했다는 당대의 고정관념을 무너뜨리고, 완벽하지 않은 생명들이 서로 연결되어 살아가는 거대한 생명의 나무를 제시했다.

70대라는 인생의 고개에서 이 책을 읽으며 특히 마음을 울린 대목은 ‘변이’와 ‘시간’에 관한 이야기였다. 자연선택설의 핵심은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한 개체가 살아남는다는 점이지만, 그 전제는 결국 수많은 차이와 다양성에 있다. 남들과 조금 다른 특성, 때로는 불완전해 보이는 변이들이 쌓여 결국 새로운 종을 탄생시킨다.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보면, 인생 역시 완벽하게 짜인 설계도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예기치 못한 변화, 불완전함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온 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냈다. 자연의 법칙이나 사람의 생이나 본질은 다르지 않다.

또한, 이 책은 ‘적자생존’이라는 단어가 주는 차갑고 서슬 퍼런 오해를 바로잡아 준다. 흔히 승자독식이나 강자만의 생존으로 오해받는 진화는, 사실 강함의 증명이 아니라 ‘적응’과 ‘다양성’의 결과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적응한 자라는 지극히 담담한 진리. 노년의 길목에서 바라본 삶의 터전도 그러하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방식을 찾아 삶을 이어가는 수많은 생명들의 정직한 노동과 생존의 노력이 눈물겹도록 아름답게 다가오는 이유다.
저자 사라시나 이사오의 문체는 유머러스하면서도 학자로서의 정밀함을 잃지 않는다. 자칫 난해할 수 있는 생물학적 개념들을 일상의 비유와 입체적인 비하인드 스토리로 번역해 주는 솜씨가 빼어나다. 그렇기에 이 책은 다윈을 ‘아는 척’하기 위해 펼쳤다가, 결국 생명의 깊이에 ‘감탄’하며 덮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지닌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더 이상 새로운 지식을 채워 넣는 일이 아니라, 지난날 알고 있던 지식의 깊이를 반추하고 삶의 지혜로 삭혀내는 과정일 것이다. 청년 시절에 이 책을 읽었다면 그저 흥미로운 과학 해설서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의 후반부에 만난 이 책은 나에게 단순한 교양서 그 이상이었다. 긴 세월 동안 쉼 없이 변화하고 흘러온 지구 위의 모든 생명에 대한 경외감, 그리고 그 거대한 흐름 속에서 한 시대를 살다가는 한 인간으로서의 겸손함을 일깨워주었다.
<종의 기원을 읽은 척할 수 있는 책>은 마침내 원전을 읽어보고 싶다는 건강한 지적 호기심을 지펴주는 마중물이자, 삶의 변주와 시간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멋진 길잡이다. 책장을 덮으며 내 서재 한구석에 오랫동안 꽂혀 있던 찰스 다윈의 두툼한 책을 슬며시 꺼내어본다. 이제는 ‘읽은 척’이 아니라, 진심 어린 눈으로 그의 문장을 마주할 준비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