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인생의 반환점을 한참 지나 칠순을 넘어선 나이가 되면, 세상의 수많은 소음이 줄어들고 지난 삶의 궤적이 비로소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한때 나를 잠 못 들게 만들었던 직장에서의 승진 경쟁, 사회적 지위, 남들과 비교하며 조바심을 내던 유치한 위계질서까지도 이제는 그저 아득한 노을빛 속의 먼지처럼 느껴지곤 한다. 그러나 모든 명함과 직함을 내려놓은 황혼의 서재에 앉아 이클립스의 <세계척학전집 : 서열의 교양>을 펼쳤을 때, 나는 우리가 평생 벗어나지 못했던 인간 사회의 가장 솔직하고도 서늘한 본질과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이 책은 현대 사회에서 정중하게 외면당하거나 은폐되어 온 '서열'과 '지위 게임'이라는 인간의 본능을 철학적·생물학적 안목으로 냉정하게 파헤친다. 현대사회는 겉으로는 평등과 자유를 외치지만, 저자는 서열이 결코 사라지지 않았으며 단지 '취향'이나 '능력', 그리고 '교양'이라는 세련된 탈을 쓰고 세탁되었을 뿐이라고 일갈한다. 수컷 동물의 영역 싸움에서부터 인간 역사 속 권력의 이동, 그리고 현대인의 은밀한 지위 자랑에 이르기까지, 저자가 펼쳐놓는 통찰은 차가우면서도 묵직한 설득력을 지닌다.

책을 읽어 내려가며 나는 지나온 70년의 삶을 가만히 반추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청년 시절의 치열했던 경쟁도, 중년 시절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 애썼던 몸부림도 모두 이 ‘서열 게임’의 판때기 위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우리는 늘 자신이 서열 노예가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타인의 시선이라는 정교한 감옥 속에서 평생을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이 책은 우리가 왜 그토록 남의 눈치를 보고, 왜 끊임없이 남보다 우위에 서고자 애썼는지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여주며, 지나온 날들의 무의미한 소모전을 묵직하게 깨닫게 만든다.

특히 가슴을 때린 대목은 서열을 인식하되 그 게임의 놀잇감이 되지 않는 지혜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는 서열의 법칙을 아는 것이 남을 짓밟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작동 원리를 파악하여 타인의 시선이라는 감옥을 벗어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황혼기에 접어든 나이에는 더 이상 누구와 승부를 겨룰 필요도,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위세를 떨 필요도 없다. 세상이 정한 위계와 평가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그 법칙을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는 유연함이야말로 노년이 가질 수 있는 진정한 ‘교양’이 아니겠는가.

이클립스의 글씨체는 날카로우면서도 깊은 사유를 담고 있어 독자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든다. 단순히 어설픈 위로나 따뜻한 덕담을 건네는 책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진 본능적 한계를 직시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역설적인 해방감을 선사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세상의 정답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가리고 있던 거품과 환상을 하나씩 거두어내는 과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내 삶에 남아있던 부질없는 자존심과 비교 의식의 찌꺼기를 깨끗하게 털어내 준 고마운 비어냄의 기록이다.

<서열의 교양>은 세파를 견뎌내며 살아온 노년의 독자에게는 지나온 삶을 다각도로 복기해 보는 깊은 성찰의 계기를, 치열한 삶의 한복판에 서 있는 이들에게는 세상의 은밀한 생리를 읽어내는 단단한 안목을 선물한다. 남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고 온전히 자신만의 품격을 지키며 남은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