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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님의 서재
  • 고난 사전
  • 허진열
  • 13,500원 (10%750)
  • 2026-07-14
  • : 1,190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인생의 고갯길을 칠십 년 넘게 넘어오다 보면, 삶이란 결국 크고 작은 고난들을 차례로 부딪치고 깨지며 건너가는 과정임을 몸소 깨닫게 된다. 젊은 시절에는 예기치 못한 시련이 닥치면 왜 하필 나에게 이런 불행이 찾아왔느냐며 하늘을 원망하고 세상을 한탄하곤 했다. 그러나 머리에 서리가 내리고 삶의 궤적이 아득히 내려다보이는 지금에 이르러서야, 고난은 불청객이 아니라 삶이라는 지도 위에 태초부터 그려져 있던 거친 지형일 뿐임을 담담히 받아들이게 된다. 허진열의 <고난 사전>은 바로 그 거칠고 험난한 인생의 지형도를 펼쳐놓고, 우리가 마주하는 온갖 고통의 이름들을 담담하게 정의하고 보듬어 안는 책이다.

 

이 책은 마치 인생이라는 망망대해를 먼저 건너간 선배가 후배들을 위해 정성스레 남겨놓은 아늑한 등대와 같다. 저자는 우리가 살면서 마주하는 수많은 종류의 고난을 ‘사전’이라는 독특한 형식을 빌려 조목조목 분류하고 분석한다. 슬픔, 상실, 실패, 질병, 외로움 등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고통의 결을 세심하게 나누어 설명하는 그의 문장들을 따라가다 보면, 내 삶의 굽이굽이마다 깊은 상흔을 남겼던 그 시절의 아픔들이 하나씩 호명되는 듯한 묘한 전율을 느끼게 된다. 사전의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차가운 정의 대신 고난을 견뎌내고 있는 인간을 향한 깊은 연민과 따뜻한 시선이 가득 차 있다.

 

“고난은 우리 삶을 파괴하기 위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내면의 가장 단단한 알갱이를 정제해 내기 위해 찾아온다.” 책에 등장하는 이 문장은 내 개인의 역사와 겹쳐지며 깊은 울림을 주었다. 돌아보면 내 삶도 평탄한 길만은 아니었다.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발버둥 치던 청춘의 고단함, 가장으로서 짊어져야 했던 무거운 책임감, 그리고 세월이 흐르며 사랑하는 이들을 먼저 보내야 했던 상실의 아픔까지. 그 모든 순간들은 당장 눈앞이 캄캄해지는 절벽이었고 건널 수 없는 강처럼 보였다. 그러나 칠십 대의 눈으로 그 고난의 터널들을 다시 복기해 보니, 그 모진 바람을 맞았기에 비로소 내 삶에 깊고 단단한 뿌리가 내렸음을 깨닫는다. 고난은 나를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라는 존재를 더 깊고 온전하게 빚어낸 거친 장인이었던 셈이다.

 

특히 저자가 고난을 대하는 태도에서 강조하는 ‘품위’와 ‘초연함’은 노년의 삶을 살아가는 나에게 큰 가르침으로 다가온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고난이 피해 가는 것은 아니다. 노화로 인한 육체의 쇠락, 역할의 상실,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등 노년기 역시 나름의 치열한 고난들과 마주해야 한다. 저자는 고난을 억지로 이겨내려 하거나 부정하기보다는, 그것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삶의 일부로 품어 안을 때 비로소 진정한 내면의 평화가 찾아온다고 말한다. 이 조언은 노년에 접어든 이들이 품어야 할 가장 고귀한 지혜이자, 흐려져 가는 삶의 눈을 밝혀주는 소중한 안경이 되어준다.

 

이 책은 단순히 개인의 아픔을 달래주는 위로 서적에 머물지 않는다. 나아가 우리가 맺고 있는 수많은 관계와 공동체 안에서 타인의 고난을 어떻게 바라보고 연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적 성찰로까지 시야를 넓힌다.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수용하고, 서로의 짐을 나누어 지는 연대의 마음이야말로 이 각박한 세상을 지탱하는 가장 존엄한 가치라는 저자의 생각에 깊이 동감한다. 일흔의 나이에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살아온 삶의 굴곡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 받은 듯하여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고난 사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인생의 거센 비바람 속에서 길을 잃고 서성이는 모든 이들에게 따뜻한 길잡이가 되어줄 책이다. 젊은 날의 뜨거운 열정 속에서 길을 잃은 청춘들에게는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잡아줄 것이며, 나와 같이 인생의 황혼기를 걷는 이들에게는 지나온 삶을 너른 품으로 보듬어 안고 남은 여정을 품위 있게 걸어갈 용기를 줄 것이다. 오늘 밤은 서재의 창문을 열고 밤하늘을 바라보며, 내 삶에 다녀간 그 모든 고난의 이름들을 하나씩 나직하게 불러보고 싶다. 그 거친 이름들이야말로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가장 아름다운 훈장이었음을 이제는 기쁘게 고백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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