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 그로스만의 『삶과 운명』: 오늘날에는 지극히 외로운 상태에 처하게 된, 리얼리즘 소설의 최고봉
1. ‘전쟁소설’ 아닌 전쟁-소설?
소비에뜨 시기 러시아 작가 바실리 그로스만의 『삶과 운명』(전 3권)이 최선 고려대 노문과 명예교수의 번역으로 창비에서 출간되었다. 원전 완역본이 출간되리라고 기대하지도 않던 전부터 전공자와 독서 애호가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었듯, 이 방대한 분량의 작품은 독소전쟁, 일명 ‘대조국전쟁’을 배경으로, 30년대 말의 ‘대숙청’ 시기 이후 찾아온 전쟁이라는 기괴한 ‘대단결’의 국면을 다루고 있다. 서사는 주인공 격 인물인 한 이론물리학자 가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선에서의 축과 수용소에서의 축 이렇게 크게 세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세 서사가 서로 접하고 뒤섞이기도 하고 또 수시로 교차되며 총 3부 201장의 대서사를 이끌어간다. 그러나 ‘전쟁소설’이라는 수식이 어쩌면 사실상 불가능할 만큼, 천오백 쪽을 헤치는 동안 나치에 대항하는 승리로 치닫는 ‘애국’ 따위의 단어나 인상을 독자에게 한순간도 상기시키지 않을 정도로, 작가는 소위 통속 ‘전쟁소설적’ 묘사에는 관심이 없었던 듯하고(이 때문에 검열 당국에 의해 원고가 압수, 파기되었을 것이겠지만), 다만 전시 소비에뜨라는 신화-권력에 의해 그야말로 난폭하게 주조되었던, 러시아 민중들이 끈질기게 살아내야만 했던 한 시대 속 ‘삶과 운명’의 면면들을 파노라마식으로 정밀하게 묘사하는 데에 집중하여 이를 수도사적인 끈기를 가지고 써내려가고 있다.
2. 러시아 문학의 전통과 다양성 속 『삶과 운명』
이 지점에서 작품은 ‘러시아 리얼리즘 소설’의 전통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겠다. 한편, 개인적으로는, 공통적인 테마, 소재를 가지고 유사한 주제의식을 공유하면서 다소 상이한 예술가적 태도를 보여준 두 작품이 떠오른다. 내전 시기를 배경으로 하지만 혁명과 전쟁과 굶주림을 체험하고 견뎌내는 사람들의 조각난 이야기를, 입체주의와도 같이 다면적, 상징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예술가’ 삘냐끄의 『벌거벗은 해』, 그리고 그런 식으로 한 개인을 덮쳐오는 시대를 내면화해 개별화된 사적 시간으로 체험하는 유리 지바고라는 시적 자아의 삶을 그린 ‘시인’ 빠스쩨르나끄의 『닥터 지바고』이다(사견으로는, 내전기를 그린 이 두 소설과 독소전쟁을 그린 본 작품에 “전쟁과 평화” 이상의 깊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소설은 러시아 소설의 전통 역시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데, 작품은 똘스또이가 구현한, 한 시대의 총체성을 끌어모은 방대한 범위의 서사와 도스또옙스끼의 인간 영혼의 심연까지 꿰뚫으려는 심리 분석, 그리고 체호프의 민중성과 그가 낚아챈 가장 작고도 조악한 현실의 삶의 막대하고도 무한한 범속성까지도 일정 부분 포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지극히 ‘러시아적인 것’의 난점과 인간 보편적인 것의 설득력
고대하던 번역본이 도착했고, 또 이처럼 완성도 높고, 대화에서의 천박한 쌍욕까지도 그대로 쌍스럽게 옮겨놓은 ‘찰진’ 번역은 정말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읽히고 만족스럽지만(덧붙이자면, 천오백 쪽에 ‘1쇄’인 것을 감안하면 오기오타도 ‘거의’ 없었다, 이는 그야말로 교정과 교정의 불굴의 노력이다), 그러나 번역본으로밖에 작품을 접할 수 없는 일반 한국 독자들에게 난점인 것은 역시 지극히 ‘러시아적인 것’의 소화일 터이다. 번역자 선생님께서 수많은 러시아 역사, 철학, 종교, 문학 인명과 지명 등에 관한 맥락 설명을 적절하게 덧붙여 놓으셨지만 참 따라가기 어려운 러시아적 멘탈리티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목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특히 도스또옙스끼적 전통이라고 할 수 있을, 각 인물이 육화된 관념이 되어 사상과 학문과 역사와 시대정신에 관한 대화를 작가의 생각과 세계관을 반영하며 끈질기게도 이어나가는 부분이 그렇다. 그러나, 이보다 더 많은 대목들에서는 시대의 특수성과 민족적 정신을 초월하는 보편성의 힘으로부터 오는, 어디서나 ‘삶과 운명’을 그려내려고 노력하는 ‘문학이라는 것’의 힘을 우리는 감지할 수 있다. 그 힘, 그 설득력은 특히 폭압적이고도 엄중한 시대의 공기 속에서 여전히 연민과 일말의 희망과 흐린 늦가을 아침 한 줄기 빛과도 같은 사랑 비슷한 무엇을 간직하고 있는 각 인물들의 개별적인 말들, 대화들, 그런 이야기들로부터 온다. 따라서 소비에트 러시아 한복판, 스딸린그라드의 전장으로부터 우리에게 도착한 이 기나긴 장편을 읽을 만한 가치가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삶과 운명』은 오랜만에 만난, 버거울 정도로 대단한 독서 체험을 선사해 준, 오늘날에는 지극히 외로운 상태에 처하게 된, ‘리얼리즘 소설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을 만한 작품이었다.
4. 덧붙임, 읽히지 않아도 되는
덧붙이자면, 우리가 자주 접해왔던 뿌쉬낀, 도스또옙스끼, 체호프 이후의 소련 시기, 그중에서도 2차대전 이후 시기의 문학은 90년 중앙일보사에서 나와 한참 전 절판된 ‘소련동구현대문학전집’에 아직도 머물러 있고 재번역 등으로 현재도 유통되고 있는 ‘거대한’ 장편은 사실상 빠스쩨르나끄와 솔제니찐 정도 뿐이다. 군소 작가의 단편집의 ‘발굴’이나 번역지원 선정작 출간이 아닌, 이런 ‘거대한’ 장편을 맡아 소개할 역량과 여건이 되는 건 큰 출판사이고 그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최근 이 책의 번역보다 반가운 일이 없었다. 번역자 최선 선생님과 창비의 담당 편집자들께 경의를 표한다(또한 소련, 러시아 문학 전문 출판사로 출발한 열린책들마저 ‘번역문학적 의의’가 있다던 자신들의 러시아어 표기법을 포기한 시점에서 독자 표기법을 유지하고 있는 창비 출판사에도 지지를 보낸다...). 또 덧붙이자면, 개인적으로는, 오랜 시간을 들여 몰입할 만한 장편을 읽을 결심을 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토르플 시험을 준비하는 와중에 책상에 두고 틈틈이 끈기있게 읽어 또 글까지 남길 수 있게 되어 "삶과 운명"의 독서 체험은 여름의 소박한 기쁨이 되었다.
*‘창비’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고,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작성된 글임을 밝힙니다.
2024년 8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