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핑키lee
  • 권태를 요리하는 법
  • 어득천
  • 9,000원 (10%500)
  • 2019-11-01
  • : 15

글쓰기는 언어 채집이다. 채집된 언어는 밀도 높은 언어로 승화되어 시가 된다. 시인의 언어를 통해 일상은 구체화되고 특별한 순간으로 바뀐다. 시인은 언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삶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언어의 마법사다.

'글 몇 줄에 의미意味를 담아 세상에 드리운다'라는 어득천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권태를 요리하는 법>이 출간됐다. 죽음, 삶, 영혼이라는 카테고리로 나누어져 있다.

어득천 시인은 삶의 본질을 섬세하게 바라본다. 특히 자연의 흐름인 사계절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우리 삶과 밀착시킨다. 이번 시집에는 자연과 일상적인 풍경 외에 산문 형식의 시가 제법 많이 수록되어 있다. 산문 형식의 시는 시인의 내면이 좀 더 깊게 담겨 있다.

<어머님 전 상서>는 마치 한 편의 소설 같은 이야기를 산문시로 압축했다. '어머니라는 이유 하나로' 한평생 인고의 세월을 감내해온 어머니를 향한 애틋한 마음이 무심한 듯 절절하다.

어머니

어머니는 견고한 성인 줄만 알았습니다

어떠한 비바람이나 폭풍우에도 언제나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모든 것을 지켜 주는 그러한 성 말입니다

세월이 지나서야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모래성이었다는 것을

(중략)

영민하고 꿈 많던 소녀였을 당신은 인생의 굽이굽이를 돌아 낯선 도시의 한편에서 생선 장수가 되었습니다

시장 어귀에 작은 천막으로 하늘을 가리고

외상으로 마련했을 생선을 자본 삼아 세상과 맞서야 했지요

겨울날의 당신은 무척이나 추워 보였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어두운 골목을 지나 시장 길로 접어들면,

멀리 가로등 아래 당신의 삶의 터전,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우리의 삶의 터전이 보였습니다

먼 발치에서의 풍경은 그런대로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어둠을 배경으로 환하게 켜져 있는 가로등,

가로등 불빛을 조명 삼아 하얀 눈송이들 허공으로 흩어지고,

사람들 종종걸음으로 발길을 재촉하는

당신은 떨어지는 눈송이를 보면서 어떠한 생각을 했을까요

차운 겨울바람에 이미 볼은 시퍼렇게 얼어 버렸습니다

투박한 겨울 털신도 몰려드는 냉기를 이겨내기엔 역부족이었을 것입니다

(중략)

건강하시기를,

건강하여 언제나 제 가슴속에 살아 계시기를

----- <어머님 전 상서' 中에서>

시는 멀리 있지 않다. 시는 일상의 모든 것에 생명을 불어 넣는다. 열린 시선으로 빚어내는 시는 다채롭다.

사노, 라면

이 세상

많고 많은 라면 중에

가장 이상한 라면이지

먹어도

먹어도 아침이면 다시 한 그릇 뚝딱!

화수분이랄까

(중략)

사노,라면

이게 원래 좀 싱겁기는 해

훌훌 잘 넘어가다 목에 컥 걸리기도 하고 말야

한 사십 년 먹으면 그때부터 좀 질린다 하지

그래도 있을 때 맛있게 먹어

레시피도 좀 바꿔 보고

사노라면

좋은 날도 오겠지만

또 죽는 날도 오지 않겠어

죽는 날 오기 전에 사노,라면 맛있게 먹자

권태, 우울, 허무 이런 양념 넘 쓰지 말고

맛들이면 몸에 안 좋은 거 알잖아

(중략)

- 재치 있는 시다. 일상적인 언어를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읽다 보면 고개를 끄덕끄덕, 빙그레 미소가 떠오른다.

바보 같은 여자

나는

너에게 쉬운 사람이고 싶다

물이 되라 하면 물이 되고

바람이 되라 하면 바람이 되고

그냥 돌이 되어 그대로 멈추라면 돌이 되어 멈추겠다

문득 생각난 듯 전화를 하였다가

생각해 보니 시시해서 다음에 만나자, 하여도

전혀 마음의 부담이 되지 않는 백 퍼센트 쉬운 사람으로 남고 싶다

나는 너에게 순진한 사람이고 싶다

물을 보고 술이라 하면 술로 알고

하늘 보고 바다라 하면 바다로 알고

나무 보고 꽃이라 하면 꽃으로 알겠다

애인처럼 만나다

문득 네가 싫어졌다 하여도

전혀 마음의 부담이 되지 않는 백 퍼센트 순진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바보 같은 사람이고 싶다

바보 같은 웃음이 싫다 해도 바보같이 그저 웃고

바보 같은 마음이 싫다 해도 바보같이 마음 주고

바보 같은 눈물이 싫다 해도 바보같이 울겠다

똑똑한 세상에 바보 하나쯤은 곁에 있어 줘야 하지 않을까

눈물 콧물 다 받아 줄 수 있는 그런 왕바보 하나쯤은

어려운 세상에

어떤 이유로도 훌훌 털어 버릴 수 있는

제일 쉬운 사람이고 싶다

그런 바보 같은 여자 하나 있으면 좋겠다

- 사랑이 내 안에 들어오면 나는 네가 된다. 그것은 기쁨이고 아름다움이고 신비스러운 일이다. 사랑의 힘은 우리 안에 내재된 존재의 전환을 일으킨다. 하여 사랑은 영원을 꿈꾸는 영혼의 비상이다. 스탕달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면 그만 혼자 훌쩍이며 울고 만다'라고 했다. 어쩌면 '바보 같은 여자'도 그러할 것이다. 사랑의 일방통행은 아프다.

권태를 요리하는 법

나른한 오후

권태가 잠들길 기다려 목을 조른다

질긴 모가지에 핏줄이 도드라지도록 힘껏 조른다

사지가 축 늘어지면 숨을 쉬고 있는지 다시 확인한다

도마 위에 올린다

중화반점 주방장 묵직한 칼로 목을 단칼에 찍어 낸다

보드라운 듯 끈적한 점액질의 껍질을 조심히 벗겨 낸다

가슴 중앙과 배꼽들 지나도록 배를 가른다

탄력을 잃은 지 오래인 심장을 떼어 낸다

끊임없이 시간을 되새김질하던 밥통도 제거한다

요리하기 좋은 사이즈로 토막 낸다

갖은양념에 재워 숙성시킨다

비 오는 어느 날

마음에 맞는 지구인 두엇 초대한다

은근히 달궈진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른다

갖은양념에 잘 숙성된 권태를 올려놓는다

속살까지 발갛게 부풀어 오르도록 굽는다

녹슨 시간의 즙汁이 그 맛을 좌우하니,

즙이 새지 않도록 이리저리 정성껏 뒤집는다

한 점 입에 넣는다

되새김질하는 소처럼 천천히 맛을 음미한다

녹슨 시간의 즙汁 이 가득 고이면 천천히 목구멍으로 밀어 넣는다

생경한 그 맛에 고개를 갸우뚱할지도 모르니,

권태롭지 않도록 가슴으로 마알간 소주를 간간이 들이붓는다

마음에 맞는 지구인 두엇으로도 이 세상이 충분하다는 듯 웃어 재낀다

허나,

나는 권태가 고기인지 야채인지, 질긴지 부드러운지,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알지를 못한다는 사실에 함정이 있다

권태를 목 조르면 권태만 달랑 죽는 것인지, 권태의 宿主인 나도 같이 죽는 것인지 알지를 못한다는 사실에 더 큰 함정이 있다

정작 나는 권태를 죽일, 아니 이별한 생각이 전혀 없는지도 모르겠다

게으른 듯 따듯한 눈빛으로 유혹하는 끈적한 점액질의 덩어리들을,

녹슨 시간의 즙汁을

- 권태는 평온한 일상에서 온다.

익숙함은 권태를 수반한다.

권태는 욕망의 부산물이다.

시인은 '권태를 이별할 생각이 전혀 없는지도 모르겠다'라고 한다.

어쩌면 삶이 고단한 이에겐 권태를 느낄 여유조차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권태를 적당히 즐기고 떠나보내자.

권태를 요리하는 팁 하나, 갖은양념에 '도파민'이라는 소스를 넣어보자.

단, 과식은 금물.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