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즘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고민이 하나 있다.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주변을 둘러보고, 혼자 끊임없이 일기를 쓰고, 친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봐도 자꾸만 가슴이 답답해지는 고민이었다. 사피엔스는 그런 내 고민에 예상 외의 명쾌한 답을 내려준 책이었다.
'일실론은 질서를 설명하지만 악 앞에서 쩔쩔 맨다. 이신론은 악을 설명하지만 질서 앞에서 당황한다. 온 우주를 창조한 전능 유일신이 악하다고 하면 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사피엔스에 나온 한 구절이다. 어릴 때부터 기독교인으로 살아온 나로서는 신박한 주장이었다. 깔끔하고 명쾌했다. 그래, 세상은 원래 악하지. 인간도, 세상도 정말 악해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일들이 마구 일어나. 노예제도, 죽어가는 기아들, 남의 삶을 짓밟는 사람들. 그 모든 것이 원래 세상이 악해서 일어나는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니까 쉽게 납득이 갔다. 하나님이 선한 의도로 세상을 창조했다면 왜 이렇게 세상에는 안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는지, 왜 이렇게 말도 안 되게 불공평한지, 모두 납득이 갔다. 그리고 오히려 인간이 기특하게 보였다. 이 악한 세상에서 악하게 태어나, 조금이라도 선해지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가여웠다. 세상을 좀더 낫게 만들어 보려고 우리 모두는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으니까. 안 될 걸 알면서도 우리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 주장하고, 외면보다 내면이 소중하다고 말하고, 차별과 불평등을 비판하고. 본능을 거스르는 걸 알기에 더더욱 강조하고 매일 같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 우리 모두가 가엽고, 그렇게라도 세상에 작은 선의 뿌리라도 내려보려는 모두가 기특했다.
인간이 발전하기 시작한 건, 없는 것을 함께 상상해내는 능력 덕분이라고 한다. 그 능력은 우리에게 자유, 사랑, 평등, 행복 등의 개념부터 종교, 경제, 돈, 정치 등의 개념까지 만들어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고 미래를 향해 달릴 수 있게 되었다.우리는 지금도 그런 관념들을 믿으며 이를 지키며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누군가는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차별을 막기 위해 거리시위를 나가며 살아간다. 악한 세상에 태어나서, 가치를 믿고 지키려는 우리 모두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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