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가까운 곳의 우리들
어떤 2024/09/08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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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술자들
- 김려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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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0) - 2024-07-26
: 962
📑
#기술자들
#김려령
#창비
💡
가장 가까운 존재이지만 가장 멀 수 있는 가족,
가장 먼 존재이지만 가장 가까울 수 있는 타인.
그런 것들을 현실과 가장 가까운 언어로 생동감 있게 풀어냈다.
실제 대화에서 사용하는 생생하고 통통 튀는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실제 생활에서 가장 밀접한 그림을 그려냈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고 귀기울여 듣지 않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현실에서의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이 여기에 있음을, 사실 아주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린다.
잊지 않도록 새겨준다.
가장 마음에 남았던 글은 '상자'와 '황금꽃다발'.
🔖
"알아. 그래서 순전히 내 문제라고 한 거야. 추억을 저장하는 방식은 집마다 다를 테니까. 그리고 이건 좀 다른 말인데, 나는 네 올케 임신 때문에 온 가족이 모였다는 것도 살짝 불편했어. 당연히 축하할 일이지만, 각자 다른 도시에 사는 가족들이 단지 누가 임신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모여서 식사한다는 게 좀 이해가 안 됐어. 게다가 넌 이유도 모르고 그냥 아버님이 내려와라, 다 같이 식사하자, 그 말 한마디에 네시간이나 달려서 내려갔다고. 전에도 몇번 그랬지. 너희 집을 내 기준에서 좋다 나쁘다 평가하는 건 절대 아냐. 단지 그런 일에 내가 자꾸 이상해지고 싶지 않을 뿐이야. 너희 집은 계속 그럴 거고, 그때마다 난 불편하겠지.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그래도 가족 모임은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했는데, 그 상자는 정말 아니었어. 배냇저고리, 나달나달한 담요, 빛바랜 젖꼭지, 딸랑이...... 그걸 담고 있는 어머님 한복 상자. 어머니 치마폭에 그대로 갇힌 아기. 내 생각이 너무 나갔다는 거 알아. 그만큼 불편하고 적나라했다는 거야. 그런데 넌 그걸 또 새 상자에 담고 싶어 했어. 앞으로도 또 30년을, 아니 그보다 더 오래 간직할 수도 있겠지. 숨 막혀. 옆에 못 있겠어. 이미 그렇게 됐어. 내 연인이 옆자리 직장동료보다 불편하면 사랑이 무슨 의미가 있어. 미안하다. 집에 있는 내 물건들 다 버려줘. 혹시 내 집에 있는 네 물건 중에 필요한 거 있니? 보내줄게."
"아니, 없어. 다 버려."
52~53p, <상자>
작은놈하고 나는 큰놈이 뭐 하는 놈인지 잘 모른다. 무슨 공부로 무슨 박사가 됐는지도 모르고, 무슨 책에 어떤 이야기를 썼는지도 모른다. 무슨 박사라고 말한 적도 없고, 무슨 책을 썼다고 가져온 적도 없다. 들어보니 TV에도 심심찮게 나오는 모양인데 이렇듯 우연히 보는 게 아니면 나온 줄도 모른다. 나보다 먼저 죽을 듯 파리한 꼴로 나와서 어머니는, 어머니가, 해대는데 염병도 그런 염병이 없었다. 제 어미가 이때까지 비행기 한번 안 타본 걸 기가 막히게 잘 포장했다.
"삶의 반경만 보면 매우 좁습니다. 어떻게 보면 늘 그곳에 상주하는 분이셨죠. 그런데 때마다 이곳저곳을 다니는 저보다 당신의 혜안이 더 넓었습니다. 사유란 그런 겁니다. 얼마나 깊게 보는가. 그 깊은 사유를 통해 세상을 읽으셨죠. 저는 감히 흉내도 못 낼 정도로."
작은 삶의 반경 안에서도 무슨 대단한 철학적 사유를 하는, 내가 그런 어머니라고 했다. 저는 미처 볼 수 없는 어떤 아름다움을 보는 사람이라고. 오래 살다보니 별소리를 다 듣는다. 내가 언제 이 동네를 그리 아름다워했더냐. 딱히 갈 곳 없어 살긴 산다만 징그럽다 징그러워. 나도 비행기 타고 너 공부했다는 나라에 가서 고철덩이 탑도 보고 싶고, 남들 다 다녀왔다는 베트남 가서 쌀국수 한번 먹어보고 싶다. 늙은 어미 데리고 외국에서 며칠 지내기가 그리 껄끄럽더냐. 사회자가 교수님 작가님 두 호칭을 섞어 부르는데, 너 뭐 가르치고 뭐 쓰는 놈이냐. 내가 너에 대해 이토록 아는 게 없는데, 너는 내가 모르는 나까지 무척 잘 아는구나. 고얀놈.
"잠 온다. 꺼라."
나이 먹는다고 저절로 사람이 되는 게 아니었다. '분이셨죠?' 방송에서 나에 대해 한 얘기는 산 사람이 아니라 죽은 사람에 대한 회고였다. 제 바로 밑으로 태어나 이른 나이에 떠난 누이와 아버지는 실제 죽었으니 개의치 않는 것 같았고, 작은놈은 언급도 하지 않는 것으로 존재를 없고, 나는 과거 모습만 언급함으로써 지금의 나를 죽였다.
68~69p, <황금 꽃다발>
※ 이 게시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은 #서평단 활동의 일원으로,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changbi_ins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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