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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하는 이들에게만 보이는 것들
  • 모데란
  • 데이비드 R. 번치
  • 18,000원 (10%1,000)
  • 2025-02-28
  • : 2,710




작년부터 SF 고전을 여럿 작품 접해서일까. 뉴웨이브의 대표격이라고 할 만큼 문학적이고 인문적이다. 번치의 작품이 처음임에도 그 느낌이 낯설지가 않다. 할란 엘리슨과 젤라즈니의 단편들보다 나를 더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다. 디스토피아적 상상물은 넘쳐난다. 그럼에도 이 SF 고전이 진부하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 시대를 넘어선 세련미와 유치하게 있는 척! 하는, 날것의 재미가 아닐까 한다. 마초 주인공의 자뻑이 주라고 하면 공감이 될까.

모데란의 세계는 단순하다. 마초의 세계란 게 그렇고 그렇지. 복잡할 거리도 이유도 의미도 없다. 그렇기에 이게 가능해? 이게 말이 돼?라는 식의 과학적 혹은 섬세한 접근 따위도 필요 없다. 여기엔 한 인간, 모데란이 되어 모데란을 살아가는 한 남자의 삶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철학적이고 문학적이다. 비정상적인 공포가 매력적인 만큼 날카롭고 많은 질문을 던진다. 살점을 버리고 나아가 육체마저 버리고서도 인간을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늘 그렇듯 비정상적인 욕망이 현실이 되는 세상은 암울하고 허무하다.

이야기의 시작 또한 흥미롭다. 서론만 읽었을 뿐인데 머릿속엔 엉뚱한 상상들이 한가득이다. 특정 장면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영화의 코믹스러운 장면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내가 싸구려 쾌락용 빛줄기인 줄 알아? 싫어."라는 대사에서는 영화 <Her>도 생각났다. 남자들의 여성관이란 늘 이렇게 편협하다.

서론에는 모데란의 후손이 고대 모데란 선조의 테이프를 발견해서 이 책을 쓰게 된 과정을 얘기하고 있다. 즉 뒷이야기에서 등장하는 10번 성채가 남긴 기록으로 조잡했던 그 시대의 삶을 짐작하는 내용이다. 분량에 고꾸라질 필요는 없다. 40여 편의 무수한 짧은 단편들은 거대한 세계관을 설명하지 않는다. 10번 성채의 삶과 고뇌에 관한 에피소드를 만나다 보면 절로 살점에 흐르는 피를 가진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경애감이 든다.

기계를 수리하는 기계가 있는, 즉 죽을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된 인류가 진보하기까지는 비극적 시나리오가 필요하다. 단골 소재인 핵 전쟁과 환경 오염은 인류의 삶을 냉혹하게 한다. 이처럼 인간 혐오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다채로운 상상력을 유발한다. 인간이란 많은 면에서 끔찍하고 비열하고 부도덕한 존재며 나약하다. 인간의 신체는 더 이상 살점을 지닌 채 버틸 수가 없다. 과학의 '진보'는 모든 것을 바꾸었다. 모데란의 태초는 그렇게 탄생했다. 올데란의 삶을 견딜 수 없는 자들은 <주름도 처짐도 없는> 플라스틱 대지와 모조품 나무와 안정적 대기로 완전무결한 무균 세상을 이루어낸다. 이제 인간만 완전해지면 된다. 살점을 버리고 금속 인간이 된 10번 성채는 <그날 나비는 독수리만큼 컷다네>에서 강인한 존재로 거듭난다. 강철로 벼린 성채에서 쿵쿵 폭탄과 쾌락을 채워줄 금속 애인이면 영원의 삶을 꿈꿀 수 있다. 얼마나 짜릿한가.

<반구형 거품 주택>에 거주하는 다양한 평균 미만의 너덜너덜한 인류는 모데란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 10번 성채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선택받은 자(오직 뛰어난 젊은 남성)이자 계몽된 자(어딜 감히)다. 욕망의 동력은 올데란의 비극적 삶과 실패였다. 아홉 번의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체력을 지녔다는 자부심은 허세와 허풍으로 뿜어져 나온다. 그렇다면 시간을 이겨먹은 이 감정 없는 위대한 존재에게 필요한 건 무엇일까. 인류사를 돌아보면 인간을 갉아먹는 것은 권태와 공포다. 전쟁도 그렇게 촉발되었기에 모데란의 영원을 견디기 위해 선택한 것은 전쟁이다. 증오와 복수로 불타는 자의 평범한 욕망이 비정상적인 공포를 만나 폭탄을 투하한다. 전쟁과 휴전, 파괴와 창조의 서클이 반복된다. 그렇지만 신금속 괴물과 신금속 인간 사이에는 우주를 집어삼키는 심연처럼 깊은 간극과 차이점이 존재했다. 살아남았음을 느끼고 그 의도를 이해하는 것과 같은. 감정은 조절 버튼에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펄떡펄떡 뛰는 심장이다. 심장!

번치의 디스토피아는 엉뚱하지만 진지하다. 유치하고 순진한 미친 것들에 대한 중립적 묘사와 인간 본성에 대한 화통한 냉소가 가득하다. 인간의 의미에 관해 다른 관점을 보여준 <새 왕은 웃음거리가 아니니>, 의미도 없는 휴전에 의미를 부여한 자의 허탈함에 관한 <모데란의 막간극>, 떠나지도 못할 거면서 사뭇 진지했던 삶의 목적에 대한 고민 <최종 결론>. 영혼 없는 영원의 삶에 대한 고찰과 전쟁 외전에서 보여준 풍자와 해학까지.

기억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모데란의 일상생활에서 선과 양심 그리고 사랑을 일깨운다. 모조 꽃을 피워내는 봄일지라도 계절 감각은 본능처럼 되살아 심연을 간지럽힌다. <성채안의 기묘한 그림자>에서 일렁이는 양심의 형체, 10번 성채를 아빠라 부르는 꼬마 소녀로 인해 이상이 생기는 감정 버튼과 마누라였던 그녀를 향한 질투심, 살인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영원의 지루함 등에서 모데란 종말의 전조를 예감한다. 영원의 삶도, 쾌락을 위한 전쟁도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채울 수 없다. 결국 미래 역시 과학 기술이 낳은 '오염'으로 가득할 뿐이다. 인간의 존재와 존엄의 가치는 무엇으로 되살릴 수 있을까. 마음을 앓는 이가 간절히 원하던 심장! 을 찾아야 할 텐데.


*제공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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