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외 3부작 - 무라카미 하루키, 비채, 2013
무라카미 하루키가 패션잡지 `앙앙`에 연재한 에세이를 책으로 묶었다.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총 3권의 연작 시리즈로 발간되었다.
특별한 주제를 정한 것이 없이 하루키의 소소한 생각들을 솔직한 문장으로 적고 있다. 읽다보면 하루키란 사람은 참 엉뚱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조금은 어이없는 생각들도 있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상당히 공감가는 부분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작가의 초상을 통해 일찍 죽은 작가들은 언제까지고 젊을 때 얼굴로 남아있는데 비해, 장수한 작가는 죽기 직전의 사진이 `기본`으로 정착되는 일이 많기 때문에 `너무 장수하는 것도 좀 그렇군`하는 생각이 든다고 하는 것이나, `새빨간 거짓말`의 어원을 거짓으로 둘러대는 글에서는 나도 갑자기 왜 `새빨간` 이라고 표현하는 지 궁금해져서 인터넷을 뒤적여 보기도 했다.
리히테르는 라이브 녹음이어서 마지막에 청중의 박수소리가 들어가 있는데 나는 이 박수 또한 좋다. 과연 이탈리아인 들이다. 곡의 마지막 한 음이 공기에 빨려들어가 사라질까 말까 할 때, 마치 오페라 아리아를 마주했을 때와 같은 절묘한 반응으로 우와아아아 하는 결광적인 박수와 환성을 잊지 않는다. 관중이 얼마나 깊이 매료되었는지 짜릿하게 전해진다. 진정한 박수란 이런 것이지 싶은 훌륭한 박수다. (.....) 음악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그만 리히테르 음반에 녹음되어 있는 박수와 같은 타이밍에 치고 말았다. 요컨데 `곡의 마지막 한 음이 공기에 빨려들어가 사라질까 말까`할 때, 반사적으로 우와아아아 하면 박수를 친 것이다. 정말 부끄러웠다. 여기는 일본이다. 그 대목에서 박수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
인생에는 감동도 수없이 많지만 부끄러운 일도 딱 그만큼 많다. 그래도 뭐, 인생에 감동만 있다면 아마 피곤할테죠.
[저녁 무렵 면도하기] -p.102-
나도 지금까지 인생에서 적지않은 사람들에게 이별을 고해왔지만 `안녕`을 능숙하게 말했던 예는 거의 기억에 없다. 지금 돌이켜보면 `좀 더 제대로 말했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후회가 남는다 - 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설령 후회스럽다고 해도 그래서 삶의 방식을 고칠 것도 아니고),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무책임한 인간인가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인간은 아마 어떤 일이 생겨 갑자기 덜컥 죽는 게 아니라 여러가지 이유를 켜켜이 조금씩 쌓으면서 죽음으로 가는 것 일테죠.
[저녁 무렵 면도하기] -p.205-
(야구감독인) 나가시마 시게오씨는 (....) 감독시절 `나는 선수를 신뢰합니다만, 신용하지는 않습니다`라고 인터뷰했다. 그때는 `또 의미없는 말장난 이라니` 싶었지만, 시간이 지나 내가 그 나름의 입장이 돼보니 그 뉘앙스가 마음깊이 이해됬다. 주위 사람을 기본적으로 신뢰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안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무턱대고 신용하여 서로가 피해를 보는 경우도 있다. (...)
사람을 신뢰하면서 신용하지 못하는 인생이란 것 역시 때로는 고독한 것이다. 그런 미묘한 틈, 괴리 같은 것이 통증을 초래하며 우리를 잠 못 이루게 하는 밤도 있을 것이다.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p.54-
악마도, 깊고 푸른 바다도 어쩌면 바깥이 아니라 내 마음안에 있는 것일지 모른다. 그 한없이 깊은 해저의 웅덩이를 떠올릴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 그것은 늘 어딘가에서 잠재적으로 우리가 지나가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인생이란게 뭔가 두렵군요.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p.107-
예를들어 아내는 튀김이나 냄비 요리를 전반적으로 좋아하지 않아서, 결혼하고 지금까지 그런 건 일절 만들어주지 않는다. `삶의 방식을 거스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니 반론할 여지가 없다. 부부라고는 하지만 `삶의 방식을 거슬러 줘`라고는 차마 못한다. ` 그럼 당신도 한 가지 삶의 방식을 거슬러 줘`라고 하면 상당히 곤란하니까.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p.168-
그렇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삶의 방식` 일 수 있다. 내가 사소하게 생각하는 어떤 것도 상대방에게 `삶의 방식`으로 작동할 때는 그에게는 절대 사소한 것이 아닐 것이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숱하게 `삶의 방식`을 거스를 것을 요구해 왔을까..
(오믈렛 전용 프라이팬을) 이 상태로 만들기까지 들여야 하는 시간과 수고가 상당하다. 새 프라이팬은 좀처럼 오믈렛을 만드는데에 협조해주지 않는다. 그런 프라이팬을 어르고 달래고 칭찬하고 협박해서 간신히 내 것으로 만든다. 일단 내 것이 된 뒤에도 사용 후 관리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조금만 얼룩이 남아도 달걀은 삐쳐서 예쁘게 미끄러져주지 않는다. 꽤 까다롭다. 생각해보면 고작 아침밥 반찬인데.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 p.38-
어디 오믈렛용 프라이팬 뿐이겠는가. 세상 모든 일이, 물건이, 사람이 다 그렇다.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여야 하며 또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해야 하는가. 세상에 공짜란 없으니까. 고작 아침밥 반찬조차 그럴진대...
나이먹는 것을 여러가지를 잃어가는 과정으로 보는가, 혹은 여러가지를 쌓아가는 과정으로 보는가에 따라 인생의 퀄리티는 한참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 p.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