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행을 좋아한다.
그리고 또 많이 좋아한다. 그 분, 김영하 작가님을.
여행의 이유라는 제목의 신간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예약주문을 걸어서 초판본을 구했다!
아니 이처럼 여행을 좋아하시는 분이였다니. 나도 여행을 좋아하지만 작가님처럼 그렇게 길게 툭툭 털고 떠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나마 5년 전에 회사 이직할 타이밍에 3개월 유럽 배낭여행 갔다 온 게(나의 블로그의 시발점) 아마 최초의 장기 여행이자 마음 편하게 훌훌 떠났던 내 인생 최고의 순간으로 기억될 여행이었지 않았나 싶다.
또 공통점을 하나 발견했다. 좋아하는 사람과는 이렇게 뭔가 계속 공통점을 찾을려고 하지 않나. 작가님도 첫 해외 여행지가 중국이었다라는 점. 게다가 대학때 뽑혀서 간 거라는 점. 암튼 각설하고 첫 번째 글 [추방과 멀미]는 이처럼 나에겐 더 특별하게 전달되었다. 이런거 저런거 다 떠나서 까페에서 읽는데 웃겨서 혼났다. 그 흔한 단어를 어쩌면 그렇게 절묘하게 그 자리에 넣어서 그 단어 아니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게끔 만드시는지 그저 감탄할 뿐.
예를 들면 이런 것
...한국관광공사에 가서 '공산권 주민 접촉시 유의사항' 같은 주제의 교육을 받았다. ...(중략)... (이 소양 교육은 1992년에야 폐지되었다). 코엑스에 있는 인터컨티넨탈호텔에 모여 호텔 이용에 관한 예절 교육도 받았다. 해외에 나가면 민간 외교관이다, 나라를 대표한다는 생각을 한시도 잊지 말고 예의바르게 행동해야 한다는 훈화를 들었다. 식당에서는 포크와 나이프 사용법을 배웠고(우리가 젓가락을 쓰는 나라로 간다는 것은 고려하지 않은 것 같았다), 차례차례 빈 객실에도 들어가 호텔방의 구조를 익혔다. 이런 난리를 치른 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나라를 떠날 수 있었다.
(p34)
그런데 일행 중 한 명이 나를 보자마자 내 귀를 가리키며 물었다.
"귀에 그게 뭐예요?"
그건 키미테라는 이름의 패치형 멀미약으로 귀 뒤에 붙이도록 되어 있었다. 나 말고는 아무도 그걸 붙이고 있지 않아서 오히려 내가 놀랐다. 비행기의 멀미가 대단하다던데 어떻게 다들 아무 준비도 없이 나타난 것일까? 일행들이 몰려들어 모두 내 귀 뒤에 붙어 있는 키미테를 구경했다. (p34)
그 당시 중국으로 여행을 떠나기 전 현실을 묘사한 장면에서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푸념하는 모습이 상상되었고, 그 키미테 (나도 키미테를 안다고 말하면 옛날사람 되는 건가) 사건도 진지한 작가님 모습과 오버랩 되면서 웃음이 터졌다.
원래 이런 과거를 회상하는 씬은 작가님이 2005년 상해 푸동공항에서 추방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시작된다. 그러면서 해외 첫 여행지였던 중국 여행을 떠올리고, 그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 힘입어 중국은 아마 이런 나라일 것이다라는 확신과 기대가 눈앞에서 와르르 무너졌을 때 느꼈던 상실감 내지는 충격의 잔존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면서 또 다시 등장하는 멀미약 패치.
멀미약 패치를 귀 뒤에 붙이고 나타난 나의 무의식은 아마도 중국에서 내가 겪게 될 현실, 그것이 야기할 일종의 정신적 멀미에 대한 두려움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사회주의 중국은 내가 책을 보며 상상했던 나라와 너무도 달랐다. ...(중략)... 젊은 엘리트들은 미국을 선망하고, 인민들은 믿을 수 없이 초라하고 남루했다. 최초의 해외여행에서 겪은 이 혼란과 실망은 그대로 내안에 침전되어 있었을 것이다. (p50)
마지막 부분에 작가님이 생각하는 여행의 의미가 나온다. 바로 여행이란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것, 바로 그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p51
차례
1. 추방과 멀미
2.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3. 오직 현재
4. 여행하는 인간, 호모 비아토르
5.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여행
6. 그림자를 판 사나이
7. 아폴로 8호에서 보내온 사진
8. 노바디의 여행
9. 여행으로 돌아가다
작가의 말
차례는 이렇다.
각 챕터의 짧은 글들은 당연히 모두 여행과 관련있다.
작가님이 말씀하시는 여행에 대한 생각은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여행지에 도착해서 예약해둔 호텔에 도착하고, 방을 안내받아 깔끔하게 정리된 순백의 시트 위에 누워 안도하는 그런 경험을 그리워하며 살아간다.(p56)
여행은 우리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끌어내 현재로 데려다 놓는다.(82)
내 발로 다녀온 여행은 생생하고 강렬하지만 미처 정리되지 않은 인상으로만 남곤 한다. 일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모호한 감정이 소설 속 심리 묘사를 통해 명확해지듯, 우리의 여행 경험도 타자의 시각과 언어를 통해 좀더 명료해진다.(p117)
준 만큼 받는 관계보다 누군가에게 준 것이 돌고 돌아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세상이 더 살 만한 세상이 아닐까. 이런 환대의 순환을 가장 잘 경험할 수 있는 게 여행이다. (p147)
그러니 현명한 여행자의 태도는 키클롭스 이후의 오디세우스처럼 스스로를 낮추고 노바디로 움직이는 것이다. (p185)
자기 의지를 가지고 낯선 곳에 도착해 몸의 온갓 감각을 열어 그것을 느끼는 경험. 한 번이라도 그것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일상이 아닌 여행이 인생의 원점이 된다. (p207)
그토록 여행을 갈망하면서 여행은 나에게 무엇이었나. 단순히 일상을 벗어난 탈출구였나 현재를 느끼고 살아 숨쉬게 하는 또 하나의 일상이었나 그토록 여행을 꿈꾸며 늘 목말라했던 나를 돌아보게 만들어 주었다.
여행은 짐을 쌀 때까지가 제일 행복하다고 혹자들은 말한다. 그만큼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고되고, 때로는 위험하며, 비용도 든다. 여행지에서 돌발적인 상황에 처해 질때면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그 만고불변의 법칙이 떠오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안전하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여행을 못떠나는 만 가지 핑계를 단숨에 제압하는 단 하나의 목적, 바로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고 내가 세상 한 가운데 당당히 서 있음을 자각하고 나 자신을 오롯이 마주하게 되는 그 경험이 주는 에너지 때문이리라.
그래서 나는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목적지 없는 여행을 꿈꾸며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