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본 듯하다. 내가 장안의 한 가운데에 놓여있는 것 같았고 장소경이라도 된 마냥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중국 소설의 스케일을 느꼈다. 중국 문학은 거의 로맨스 소설로만 접했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색다른 재미를 느꼈던 것 같다. 어느 정도의 역사적인 팩트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기 때문에 지루할 줄 알았다. 그리고 책의 두께도 두꺼워서 처음에는 읽기가 겁났으나 너무 재밌어서 굉장히 빠른 속도로 읽은 것 같다. 심지어 할 일도 많았는데 할 일 다 미루고 이 책부터 읽었다. 그만큼 재밌는 소설이다. 읽으면서 이 책이 재밌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우선 첫 번째는 시간적인 제한이 있다는 것이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추격전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시간적인 제한이 없어도 긴장감을 계속 유지할 수 있긴 하겠지만 이 소설 속에서는 24시간이라는 시간적인 제한이 존재한다. 우리는 현재 24시간이라는 개념을 쓰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시진이라는 시간적인 개념을 사용했다. 하루는 12시진이고 한 시진은 두 시간이다. 이 책이 곧 중국에서 드라마화 된다는데 그 드라마의 제목이 <장안십이시진>이다. 시진이란 뜻을 몰라서 책등에 나와있는 제목이 무슨 뜻인가 했는데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시간을 뜻하는 것이었다. 장안이 통째로 없어질 수도 있는 심각한 상황이었기에 정안사는 1분 1초가 소중한 상황이었다. 정안사의 사람들이 24시간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돌궐은 24시간 안에 어떻게 테러 계획을 실행시키는지 보는 것이 이 소설의 가장 큰 재미인 것 같다. 두 번째는 끊임없는 사건들과 인물들 간의 관계다. 한 사건이 끝나면 또 한 사건이 발생한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아마 숨 돌릴 틈이 없이 다음 장을 펼치고 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답답하다고 느낄 수 있는데 또 고구마를 먹은 것처럼 답답할 때 사이다같은 사건이 등장하기도 한다. 독자들과 밀당을 정말 잘 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각각의 사건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하게 연관돼있다. 인물들도 그렇다. 읽으면서 인물들이 차근차근 정리되기는 하지만 처음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해서 당황스러울 수 있다. 누구는 동맹 관계고 누구는 적대적인 관계다. 하지만 이 관계가 확실한 것은 아니다. 아직 상권밖에 읽지 않아서(장안 24시는 상, 하 두 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뒤 내용을 잘 모르겠지만 아마 반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세한 것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말하지는 않겠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건과 인물이 유기적인 관계를 띄고 있다. 엄청 많은 사건과 인물을 배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어색하지 않게 연결한 작가가 대단하다고 느꼈다.
이 책에서는 모든 인물이 다 중요하다. 한 명 한 명 다 각자의 특성이 있고 각자 맡은 일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이필과 장소경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정안사는 서역의 위협에 대비해 조직된 특수기관이다. 이필은 정안사의 젊은 수장이다. 그에게는 장안이 인생의 전부다. 장안이 곧 불바다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는 사형수 장소경을 석방하는 과감한 결정까지 한다. 처음에는 그도 장소경을 미심쩍어 했으나 장소경의 이력과 그의 눈빛과 행동을 보고 장안을 맡겨도 되겠다는 믿음이 생겼다. 장소경 또한 장안의 백성들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소경은 조정에 깊은 원한을 품은 사형수였다. 나도 처음에는 장소경이 의심스러웠다. 그가 지혜롭긴 했으나 가끔씩 나오는 악랄한 행동에 섬뜩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에 확신을 느낀 순간이 있었다. 장소경과 요여능의 대화였는데 그때 그는 "난 그들(장안성 사람들)과 함께할 때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사적인 감정 이전에 장안성의 사람들의 안위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평범한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자신의 목숨마저 바치려 한 그의 모습에 감동을 느꼈다. 장소경을 조금이나마 의심한 내가 약간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물론 아직 하권을 읽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배신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필도 장소경만큼 장안성을 지키려고 애쓴다. 아마 둘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서로를 알아봤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이들은 아는 사이도 아니었고 그저 비즈니스 관계일 뿐이다. 그래서 고관대작들을 증오하는 장소경이 과연 이필과 함께할지, 이필도 고작 사형수라는 인간을 계속 끌고 갈지가 의문이다. 얼른 다음 편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뿐이다.
이 작품에서 자주 나오는 표현이 있다. 바로 '선택에 대한 책임'이다. 이야기의 인물들은 모두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이필은 장소경을 선택했고, 장소경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장안을 지키기로 선택했고, 요여능, 서빈 등 모두 장안성을 위한 선택을 했다. 각자 자신의 운명을 자기 스스로가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인물들은 하나같이 다 자신에 대한 행동의 책임을 진다.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그들에게 장안사는 자기 나라 그 이상의 가치를 가졌던 것일지도 모른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열정과 투지를 보여줬던 인물들. 그들의 선택에 대한 결과에 부디 좋은 일만 있길 바라는 마음이다(과몰입). 제발 해피엔딩이길....
넓디넓은 장안을 배경으로 짜임새 있는 내용을 구성한 마보융 작가. 옛날 대당 시대를 배경으로 삼았지만 전혀 거리감을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현대적인 느낌을 더 많이 받은 것 같다. 중국판 히어로물이라고 할까나. '문학귀재'라는 말이 아깝지 않다. 빨리 다음 편 읽으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