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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ven2092님의 서재
  • 흐르는 편지
  • 김숨
  • 15,120원 (10%840)
  • 2018-07-23
  • : 1,030

숨이 턱 막힌다. 첫 장을 펼친 순간부터 책을 덮을 때까지 그들의 만행에 구역질이 났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과연 내가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으며 실제로도 책을 그냥 덮어버린 적도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어떻게 이 책을 소개해야 할지, 어떤 마음을 가지고 글을 써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위안부'는 아물지 않은 상처이며 피해자들의 고통이 아직까지도 현재진행형인 상태이기 때문에 말을 하는 데 있어서 조심스러운 게 사실이다. 8월 14일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다. 이 날을 맞아 나는 소녀상 공공조형물 지정 촉구를 위한 캠페인에 서명을 했다. 피해자들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치유할 수 있도록, 그리고 역사적인 사실들을 상기시켜 다시는 비극이 만들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작은 일이라도 해야 한다. 김숨의 <흐르는 편지>가 바로 이러한 의도를 담아내고 있는 것 같다. 일본군 '위안부'의 아픔을 담아내는 작업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상상이 안 간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장면들을 정말 더 끔찍하게 묘사하는 게 너무 과한가 싶기도 했지만 이것이 모두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용된 수단이 아니었나 싶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도 아니며,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감히 그들의 고통에 연민을 느낄 수도 없었고, 공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피하고 싶었다. 너무 끔찍해서.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고통을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들어줘야 한다. 우리가 외면하면 이 끔찍한 사실들은 없어져 버리고 만다.

열다섯 살의 일본군 '위안부' 소녀인 금자. 그녀의 일본 이름은 후유코다. 소설 속에서 '나'는 절대 금자여선 안되고 후유코여야만 한다. 후유코는 일본 군인이 지어준 이름이며 '작은 숲속에서 겨울에 태어난 짐승의 새끼'라는 뜻이다.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이 조선 여자들을 짐승 취급한다. 나는 이 서평을 쓰는 순간만큼은 후유코를 '금자'라고 부르고 싶다. 이름도 몸도 자아도 잃어버린 금자. 금자는 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말에 속아서 위안소로 들어오게 된다. 위안소에서 짐승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고 폭력 속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자신의 생명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그녀는 다른 한 생명을 품게 된다. 책은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된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금자는 아이와 함께 자신도 죽어버리길 원한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안소는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강제로 끌려온 소녀들은 자기도 모르는 빚을 지고 있고, 그 빚은 하루하루 늘어만 간다. 제대로 된 옷도 없고, 제대로 된 밥도 주지도 않으면서 의식주에 해당되는 모든 것들이 다 소녀들에게는 빚이 된다. 탈출은 꿈꾸지도 못하며 그저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새들을 부러워할 뿐이다. 그녀들이 (하고 싶지 않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몸을 내어주는 일과 일본의 승리를 빌어주는 일 뿐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한 생명을 보호하고 책임져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소녀들은 잘못한 게 전혀 없지만 이제 소녀들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당연스럽게 생각하며 자기혐오, 자기모멸 속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금자는 아기를 낳기로 결정한다. 아기와 자신의 죽음을 바랐던 소녀가 살고자 한다. 친구가 죽고, 군인이 죽고, 주변 사람들이 죽는 모습을 계속해서 목격하면서 결국에는 삶의 태도를 바꾸게 된 것이다. 우리도 살면서 뭔가를 잃어버렸을 때 찾고자 하는 의지가 생길 때가 있다. 바로 이 경우랑 비슷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흐르는 편지>를 읽으면서 '안돼, 죽지 마', '제발 살아줘'라고 마음속으로 계속 외쳤다. 위안소에서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갖는 게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제발 살아달라고 빌었다. 내가 너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다고 찾아가서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금자가 어떤 심경의 변화를 겪었는지 감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그녀의 선택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녀가 살아남았기에 지금 내가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금자는 어머니에게 계속해서 편지를 써 강물에 띄웠다. 그녀에게 있어서 편지란 그리운 나의 고향, 조선의 말을 쓸 수도 있었으며 자신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낼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 편지가 정말로 어머니에게 갔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편지는 흘러 흘러 지금 우리에게 왔다. 이제 더 멀리 흘려보내서는 안된다.

김숨 작가님의 <흐르는 편지> 덕분에 한 번 더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현대문학 블로그 글에 써져있던 '문학이 역사를 기억한다'라는 말이 인상 깊었다. 책과 문학은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 역사 또한 절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계속해서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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