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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ven2092님의 서재
  • 영의 기원
  • 천희란
  • 11,700원 (10%650)
  • 2018-05-24
  • : 534

 시험기간 동안 책을 읽지 못해서 책 금단현상이 나타났었다. 그냥 다 때려치우고 진짜 책이나 읽을까 싶다가도... 다시 책상에 앉곤 했다. 드디어 길고 긴 시험과 과제의 늪에서 벗어나 가장 먼저 읽은 책. 천희란의 <영의 기원>이다. 책 읽은 지 오래됐기도 했고 뭔가 내가 좋아할 스타일이라서 금방 읽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읽는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고, 이해하는데도 엄청난 시간이 필요했다. 가볍게 읽을만한 주제가 아니었다. 읽는 내내 '죽음'이라는 그림자와 함께했던 것 같다. 작가는 끈질기게 죽음이라는 단어를 언급하고, 모든 에피소드의 주제가 '죽음' 하나로 설명된다. 8개의 에피소드에서 죽음을 겪는 인물이 반드시 등장하고, 죽음에 대한 문학적인 표현들이 곳곳에 포진돼 있다.   

 '죽음'이라는 단어와 함께 항상 따라오는 '그림자'와 '어둠'. 천희란 작가는 그림자와 어둠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해 죽음을 표현했다. 그것을 잘 표현해냈다고 생각한 이야기 중 하나가 「창백한 무영의 정원」이다. 핏기가 없이 창백한 무영(그림자가 없는)의 정원이라는 뜻이다. 어떤 한 세계에 종말이 예고되자 다섯 명의 인물이 자살 모임을 결성했다. 오프라인에서 만난 그들은 숲속의 별장인 무영의 정원으로 자살 여행을 떠나고 멤버들이 차례대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들은 죽음의 순간을 서로 확인한다. 그들에게는 한 가지 규칙이 있다. 실명이 아닌 A, B, C, D, E라는 익명으로 활동하며, 만약 그들이 죽으면 그 시체 앞에서 나머지 사람들이 익명이 아닌 실명을 읊조린다. 그들만의 의식이다. '이름이 없는 존재'가 죽어서야 이름을 되찾게 된다. 종말의 세계에서 더 이상 살아갈 의욕도 없는 '불완전한 자아'의 모습을 무명의 인간들로 표현해낸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름도 없으며 그림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죽어서야 그림자가 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는 화자인 '나'가 가장 마지막으로 죽게 되는데 그 마지막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저 글자를 읽는 것뿐이었는데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처음 읽었을 때는 그림자라는 존재에 공포감을 느끼고 있는 '나'로 이해했는데 다시 읽어보니 그림자와 한 몸이 되어 오히려 죽음과 종말에 순응하는 '나'로 보였다. 이름도 그림자도 없던 그들이 죽음을 통해서야 새로운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두 번째로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다섯 개의 프렐류드, 그리고 푸가」다. '선생님'과 '효주' 이 두 사람의 편지를 통해 이야기가 전개된다. '선생님'은 '효주'의 엄마의 죽음을 목격한 목격자이다. '선생님'의 증언을 통해서 자신의 엄마가 사고가 아닌 자살로 죽음을 맞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이 두 사람은 유사 모녀 관계가 되었으며 효주는 선생님에게서 위로와 지지를 얻는다. 효주는 엄마의 죽음에 대해 처음에는 원망을 느꼈지만, 이제 곧 자신이 결혼을 하고 후에 엄마가 될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 때 엄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효주는 그렇게 성장한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선생님'의 편지는 반전 그 자체였다. 효주 엄마와 자신이 과거 동성의 연인이었고 그 죽음에 '효주' 자신이 연루되어있다는 것이다. 과연 효주는 어머님의 죽음을 이해했던 것처럼 선생님의 죽음,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숨겨진 사실들을 견뎌낼 수 있을까. 

 이 이야기들 말고도 수많은 작품들이 '죽음'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게끔 만들어줬다. 앞에서 말했듯이 읽기 쉬운 책이 아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으며 사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많다. 어려운 만큼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사실 지금까지 문학 작품에서 표현했던 '죽음'이라는 것은 끝, 종말, 마지막 이런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에서 '죽음'은 또 다른 시작, 구원, 빛의 느낌이다. '죽음'을 이렇게 새로운 느낌으로 표현해낸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했다.

 그녀는 죽음을 소재로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사회적인 메시지를 던져주었다. 죽음을 또 다른 죽음으로 몰아넣지 않기, 진심으로 애도하기,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사람들을 잊지 않기. 모두가 기억해야 할 것들이다.

 이해하기에 있어서 그리 친절하지는 않은 소설이었지만 내 마음을 사로잡기에는 충분한 소설이었다. 앞으로의 작품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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