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이 책의 제목이자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석’은 성경 속 예수의 말을 순응주의로 해석하였다. 그는 능력도 좋고 성실한 병원 관리자이다. 그리고 그의 후배인 ‘무주’.
‘무주’는 선도병원의 관리부 구매 담당으로 채용되었다가 후에 혁신위원회에 발탁된다.
‘무주’는 이때부터 시험에 들고 만다. 항상 자신을 챙겨주고 책임감 있게 일을 했던 ‘이석’이 병원 돈을 횡령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무주도 이와 같은 일을 겪어본 적이 있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상사가 지시하는 대로 회계 부정을 저질렀고, 그러다가 발각되자 상사의 권고에 따라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고 사직했다. 아마 그는 이 당시의 일에 대한 용서를 받기 위해서, 자신의 정직성을 복구하고자 이석의 비리를 고발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가 고뇌한 이유는 ‘이석’의 가정환경을 알아서다. 자신이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에(비록 그렇게 되지 못했지만) 자신의 아이에게 권위 있는 아버지가 되리라는 기대를 품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아버지들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석을 고발하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과 자신의 아이,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라면 결정해야만 했다. 자신은 대가를 치렀기 때문에 이석 또한 자신과 같이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병원 게시판에 그의 비리에 대한 비밀 글을 올렸다. 비밀 글이 오히려 마음이 편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글은 오히려 전혀 다른, 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오히려 직접적인 고발보다 익명의 고발이 더욱 무서운 심리적 동요를 일으키게 된다. 무주의 글이 퍼져 결국 이석은 사직 조치를 당한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이석은 실버타운 건설사업 본부장 직위로 병원에 복귀한다. 여기서부터 무주의 정신적 고통이 심해진다. 자신이 그를 병원에 내쫓았던 것, 그로 인해서 이석의 아이가 죽게 되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병원을 위해 선행을 했다고 칭찬해주는 것이 아닌 오히려 공명심에 눈이 멀어 비겁하게 행동했다고 비난을 받고 있는 상황에 대해 억울해한다. 하지만 이석도 결국 병원의 부패세력 중에 한 명이었고, 결국 무주는 혼자가 되고 만다. 그는 병원에게 외면받았고, 친구를 잃어버렸고, 아이를 잃어버렸으며 심지어 아내도 잃어버렸다. 모든 것이 그로부터 떠나갔다.
이 소설은 ‘병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절대 메디컬 소설이 아니다. 경제적 인간이 패권을 잡은 ‘병원’이라는 장소를 통해 부패된 현대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죽은 자로 하여금>에 나오는 선도 병원은 환자들을 위한 병원이 아니다. 환자를 생각하는 병원이 아닌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곳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에도 의료사고가 많이 일어나고 있다. 그에 따른 보상은커녕 제대로 된 사과도 하지 않고, 처벌도 강하지 않으며, 자기 병원의 이미지만 살리기에 급급해 있다. 물론 병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많은 기업, 단체들도 그러하다. 선도 병원에는 부패된 자들만 가득하고 그리고 이 병원의 대부분의 관계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방관하는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현실에 순응해 버린다. ‘이석’의 순응주의는 사실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이석’이 현실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오직 순순히 명령에 따라주고, 동조하며 ‘타락’하는 방법뿐인 것이다.
나는 ‘이석은 아니겠지’하며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이 책을 읽었다. 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소설이 아닌가. 그랬다면 진작에 우리나라는 깨끗한 사회로 바뀌었겠지. 편혜영 작가님은 무너져가는 소도시 ‘이인시’를 통해 쇠퇴해가는 자본주의 현실을 비판했고, 이인시 안에 있는 ‘선도병원’을 통해 부패와 악으로 가득한 한국을 비판했다. 그리고 이게 현실이라는 생각에 읽는 내내 불편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작품들을 읽음으로써 다시 한 번 현실을 되돌아볼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죽은 자로 하여금>은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윤리적, 도덕적인 가치들을 끌어내는 희망적인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