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부터 일주일 간 태국 방콕으로 여행을 간다. 인생 첫 동남아 여행이라서 설렘 반 걱정 반이다. 한국은 벌써 이렇게 추운데 태국은 아직 덥다고 하고, 일부러 건기를 택했는데도 일기예보에는 일주일 내내 비 소식이 떠 있고... 걱정과 불안으로 잠이 오지 않을 때 나는 주로 책을 읽는데, 방콕 여행을 준비 중인 지금이 방콕에 관한 책을 읽을 최적의 타이밍이다 싶어 고른 책 중 한 권이 이 책이다.
이 소설에는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한국에서 불법 체류하며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베트남인 남성 '훙', 훙이 일하는 공장의 사장의 딸이자 피아니스트인 한국인 여성 '정인', 동물권 운동에 헌신적으로 임하는 미국인 여성 '섬머', 정인의 오빠이자 섬머의 애인인 한국인 남성 '정우', 은퇴 후 태국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섬머의 아버지 '벤', 벤의 애인인 태국인 여성 '와이', 훙의 룸메이트가 되는 태국인 여성 '린' 등이다.
등장 인물의 소개만 봐도 알겠지만, 이들은 연령도 국적도 직업도 사회적 지위도 천차만별이다. 벤처럼 미국에서 태어나 경제적으로 유복하게 살았고 은퇴 후 태국에서 자기 딸보다 훨씬 어린 여자와 동거하는 삶을 사는 남자가 있는가 하면, 와이나 린처럼 몸뚱이 하나로 벌어 먹고 사는데 그게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는 여자들도 있다. 같은 성별이라도 미국인 남성인 벤과 한국인 남성인 정우는 유복하게 사는 반면, 베트남인 남성인 훙은 외국을 떠돌며 최하층 노동자로 살다가 신체 일부를 잃고 범죄자로 전락한다. 미국인 여성인 섬머와 한국인 여성인 정인은 좋은 교육을 받고 원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반면, 태국인 여성인 와이와 린은 그렇지 못하다. 이들을 보면 만인이 평등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현실이 국가를 넘어 국제 단위로 펼쳐진 듯하다. 성별의 차이, 국적의 차이, 경제적 계급, 사회적 지위의 차이가 개인의 삶을 어떤 식으로 규정하고 구획 짓는지를 알 수 있다.
소설 제목은 <방콕>이지만, 서울, 나아가 한국에 관한 소설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훙은 오랜만에 만난 여동생 트린과 대화를 나누면서 이런 말을 한다. "많이 벌려면 많이 잃어야 돼. / 뭘 잃어? / 그런 게 있어. / 그런 게 뭔데? / 존엄." (182-3쪽) 한국에서 훙은 손가락만 잃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엄도 잃었다고 말한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얼마 전에 본 기사 하나가 떠올랐다. 한국에 사는 네팔 이주노동자 사망자 중 자살률이 32퍼센트인데 이는 네팔 본국의 자살률의 세 배 이상이라는 내용이었다. 통계 자료이기에 개별적인 사유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한국이 그들의 존엄을 해쳤고 그것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지 않았을까. 아니기를 바라고 싶지만, 한국의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1위임을 감안할 때 아니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이 소설에는 룸피니 공원, 에라완 사원 등 태국 여행을 준비하며 친숙해진 지명과 송크란 축제, 악어 농장 등 태국 하면 떠오르는 문화 행사나 관광 상품 등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어서 발견할 때마다 반가웠다. 관광 산업을 위해 학대 당하는 코끼리들 이야기도 나오는데 너무 끔찍했다. 원래도 동물을 이용하는 관광 상품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이 소설을 읽고 무관심만으로는 (더 큰 피해 방지에)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