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전에는 타인의 노화나 질병, 죽음에 관한 책을 읽어도 깊이 공감하지 못했다. 아니, 스스로는 공감한다고 믿었지만 지금만큼 실감나게 느끼지는 못했다는 걸 이제는 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디디에 에리봉이 쓴 <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절실히 느꼈다. 디디에 에리봉은 게이이자 계급탈주자 지식인인 저자가 자신의 아버지의 죽음을 겪으며 쓴 책 <랭스로 되돌아가다>로 한국의 독자들에게 이름을 알렸다. 몇 해 전 그 책을 읽을 때에도 죽음, 그 중에서도 가까운 사람의 죽음에 대해 많은 것을 '느꼈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을 겪으며 쓴 책 <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을 읽으면서는 한줄 한줄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책을 읽던 때와 비슷한 시기에 마침 나의 외할머니도 요양병원에 들어가셨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저자의 어머니가 노인 전용 요양 시설에 들어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 전까지 자식들이 열심히 어머니를 돌봤지만 어머니의 노화와 병세가 점점 더 깊어지면서 더는 집에서 돌볼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결국 시설을 찾게 되었다. 싫다는 어머니를 설득하는 데에만 2년의 시간이 걸렸는데 어머니는 시설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얼마 안 지나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헤어질 시간이 그토록 빨리 올 줄 몰랐던 저자는 어머니를 떠나 보낸 후에야 어머니의 지나온 삶을 돌아볼 수 있었다.
전작 <랭스로 되돌아가다>에 자세히 나온 것처럼, 저자의 부모는 지방 출신의 가난하고 저학력인 노동자 계급 사람들이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남성이기라도 했지, 어머니는 여성이라는 약자, 소수자성을 하나 더 가지고 있었다. 그 시절 여자들이 대체로 그랬듯이 남자처럼 공부를 하거나 직업을 가지는 건 상상도 못했다. 이른 나이에 결혼해 다수의 아이를 임신, 출산, 양육했고, 결혼 생활 내내 남편의 육체적, 정신적 폭력에 시달렸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이제 좀 자유로워지나 했는데 노화와 질병이 찾아왔다. 말년에 열 살 연하의 유부남 앙드레와 연애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런 어머니를 이해해준 자식은 게이인 저자뿐이었다. 나머지 이성애자 아들들은 어머니가 아버지 아닌 다른 남자와 연애할 수 있다는 사실은 물론이고 남편을 여읜 여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조차 받아들이기 어려워 했다.
어머니는 요양 병원에 들어가는 걸 반대했는데, 저자는 그런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막상 어머니가 요양 병원에서 지내는 모습을 보니 반대할 만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양 병원에 들어가기 전 어머니는 자신의 집에서 혼자서 자유롭게 지냈지만, 요양병원에 들어간 후에는 그곳의 일정이나 시스템에 따라야 했다. 아직 그들만큼 늙고 아프지 않은 사람들의 눈에는 요양병원에서 지내는 사람들이 비슷비슷하게 보일지 모르나 그들 간에도 엄연한 차이가 존재했다. 어머니는 눈에 보이는 사람들과 자신이 같지 않다는 데에서 깊은 고독감을 느꼈고, 남들이 자신과 그들을 같은 (늙고 아픈) 존재로 본다는 데에서 비참함을 느꼈다. 그래서인지 요양병원에 들어간 이후 어머니의 육체와 정신은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급기야 음식 섭취를 거부하며(빨리 죽어서 나도 편하고 자식들도 편하게 해주자는 생각에) 자발적 죽음을 원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저자는 어머니의 죽음이 자신에게 남긴 상처에 대해서도 말한다. 한 사람의 죽음은 주변인들에게 '정체성 상실'이라는 고통을 남긴다. 이제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까지 잃은 저자는 더 이상 누군가의 아들이 아니게 되었고, 저자는 이로 인한 상실감을 깊이 느꼈다. 저자는 평생 가족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의 입원이나 죽음 같은 사건이 일어나면 어쩔 수 없이 가족들과 얼굴을 마주해야 했고 그 때마다 큰 불편함을 느꼈다(계급탈주자는 영원히 탈주할 수 없다). 어머니의 몸에서 난, 어머니를 누구보다 잘 아는 아들이지만, 어머니가 사는 동안 저자에 대해 얼마나 알고 이해했는지도 의문이었다. 학력이 다르고 성향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른 어머니는 저자가 좋아하는 책을 읽지 못했고, 저자가 품은 이상에 공감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족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인가.
어머니의 죽음은 '어머니가 기억하는 나'의 죽음이기도 하다. 나도 모르는 아기 때의 나,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는 유소년기, 청소년기의 나 등등 어머니만이 아는 나의 모습은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다. 그렇게 존재의 일부가 사라지면서 저자는 깊은 상실감을 느꼈고 그것은 고통으로 인식되었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면서 어머니가 아는 나의 모습도 줄어들고 있다는 생각을 요즘 들어 종종 했는데, 그렇게 나를 기억하는 누군가가 영원히 부재하게 되면 남아 있는 기억조차 부재하게 된다는 생각에는 미치지 못했다. 아직 여유가 있을 때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서로에게 더 많은 (좋은) 기억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