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컬트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직접 돈을 내고 사주나 신점을 본 적은 없고 그 흔한 타로 카페에도 가본 적 없다. 남몰래 실천하는 의식이나 징크스 같은 것도 없지만, 한국인이다 보니(?) 어려서부터 체화되어 어쩔 수 없이 지금까지도 지키는 규칙 내지는 미신 같은 게 몇 가지 있기는 하다. 이를테면 시험 전에는 미역국을 먹지 않는다든지, 밤에 손톱을 안 깎는다든지, 사람 이름을 빨간색으로 안 쓴다든지...
은모든 작가가 2024년에 발표한 소설집 <꿈과 토템>의 첫 번째 단편 <토템, 토템>은 우연히 손에 넣은 빨간색 펜으로 인해 인생이 바뀐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 이야기에서 빨간색 펜은 불운이나 저주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평가나 결정의 기준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빨간색 펜'을 가진다는 건 더 이상 남들에게 평가받는 인생을 살지 않고 스스로 가치를 정하는 인생을 살겠다는 의미, 인생의 주도권을 다시 가져오겠다는 결의랄까.
인생의 주도권을 되찾는 여자들의 이야기는 이후에도 이어진다.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면서 물건을 버린다는 건 욕심을 덜어내는 일이라는 걸 깨닫는 여자의 이야기를 담은 <꿈은, 미니멀리즘>,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집에서 편하게 먹고 놀고 마시는 명절을 보내기로 결심한 여자들의 휴일을 스케치한 <모닝 루틴>, 연락이 없는 친구에게 서운함을 느꼈다가 우연히 하게 된 소개팅을 계기로 좋은 인간관계의 비결을 깨닫는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친구가 되어 드립니다>, 불의에 맞선 것을 계기로 나이 차를 극복하고 친구가 된 두 사람이 나오는 <공범의 반대말> 등이 그렇다.
장르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 <501호의 좀비>와 <탄생>에도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인생을 개척하는 여자들이 등장한다. <501호의 좀비>는 좀비떼의 등장이라는 위기를 이용해 여자들이 힘을 합쳐 성폭력 가해자를 처벌하는 이야기이고, <탄생>은 인공 자궁이 개발되어 남성도 임신, 출산을 할 수 있게 된 세계를 그린다. 전자는 몰라도 후자는 꼭 실현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