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젠가 실수로 남의 신발을 신어본 적이 있다. 내 신발과 같은 상표, 같은 색상, 같은 크기인데 착화감이 묘하게 달라서 알았다. 공장에서 만든 신발이니 내 신발도 그 신발도 처음엔 똑같았을 텐데, 신는 사람의 발의 형태나 보행 습관, 보관 및 세척 방법 등에 의해 '다른' 신발이 되었다는 걸 여실히 느꼈다. 신발도 이런데 사람은 어떨까. 영국에서 살면서 글을 쓰는 일본인 작가 브래디 미카코의 책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는 우리말로 흔히 '공감'으로 번역되는 영단어 '엠퍼시(empathy)'에 관한 생각들을 담고 있다.
저자는 전작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에서 영국의 계층 격차와 다문화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이 단어를 언급했는데, 이 책이 큰 주목을 받으면서 엠퍼시 또한 일본 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한다. 문제는 엠퍼시가 일본에서는 '공감'으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엠퍼시와 공감은 전혀 다른 단어라는 것이다. 공감이 '비슷한 의견이나 관심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우정이나 이해'를 의미한다면, 엠퍼시는 '자신과 같지 않은 입장의 사람에 대해서도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능력 또는 지적 활동'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엠퍼시는 (공감으로 흔히 번역되지만) 공감을 반드시 수반하지 않으며, 공감하지 않고도 엠퍼시를 가질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일본의 아나키스트이자 독립운동가 박열의 아내로 잘 알려진 '가네코 후미코'이다. 가네코 후미코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 시대에 일본인이 조선인 독립운동가와 사랑에 빠지고 조선의 독립운동에 투신할 수 있었는지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로 저자는 가네코 후미코의 아나키즘 성향을 든다. 가네코 후미코는 어린 시절 가족에게 심한 학대와 방임을 당한 것을 계기로 타인이나 학교, 국가에 의지하지 않는 아나키스트의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어떻게 아나키즘이 엠퍼시로 연결되는가 하면, 아나키즘은 어떤 것에도 간섭받지 않고 모든 것을 평등하게 보기 때문에 나의 입장(신발)에서 벗어나 타인의 입장(신발)으로 보거나 생각하거나 느끼는 것이 수월하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이라는 민족적, 사회적 정체성에 구애받지 않고 조선의 독립, 일제에 대한 저항, 피지배자 해방이라는 대의를 위해 살신성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은데, '타인의 신발'을 신기 위해서는 먼저 '내 신발'을 벗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발을 벗으려면 우선 내가 어떤 신발을 신고 있는지부터 알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 필요한 도구가 '말(언어)'이다. 저자는 일본 최초로 교도소 내부를 10년간 장기 취재한 사카가미 가오리의 다큐멘터리 영화 <프리즌 서클>에 나오는 한 장면을 예로 든다. 이 장면에서 재소자들은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 감정을 말하는(언어화하는) 훈련을 하는데, 이를 통해 조금씩 피해자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고 자신이 지은 죄의 무거움을 인식하게 된다. 저자의 아들은 학교에서 아시안 차별 발언을 한 친구에게 사과를 받은 적이 있는데, 덕분에 자기 안에도 차별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사과를 하지 않을 것이다)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그만큼 '내 신발'을 벗기가 어려운 것이다.
엠퍼시는 다양한 입장과 취향이 공존하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능력이지만, 부작용도 있다. 가령 엠퍼시가 지나치면 개인이나 조직에 대한 과도한 숭배나 집착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로 사이코패스는 공감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지나치게 높아서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데에서 흥분이나 희열을 느낀다는 분석도 있다. 타인의 욕망이나 동기를 정확히 읽어내는 능력은 알고리즘, 데이터 분석 같은 신기술과 만나서 긍정적인 효과를 낼 수도 있지만, 프라이버시 침해나 과소비 조장 같은 폐해를 낳을 수도 있다.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는 것이 필요한 때가 있는 것처럼, 신었다가도 벗는 것, 아예 신지 않는 것이 필요한 때도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