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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의 책다락
  • 슬픔의 물리학
  •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
  • 16,200원 (10%900)
  • 2026-03-24
  • : 5,030



영화 <백 투 더 퓨처>처럼 과거의 어느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당신은 어느 때로 돌아가고 싶은가. 과거로 돌아가는 건 싫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언젠가는 자의와 무관하게 과거에 갇혀 살게 될지도 모른다. 대표적인 예가 알츠하이머병이다. 2023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수상한 불가리아 작가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의 세 번째 장편소설 <타임 셸터>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려서 과거의 기억 속에서 살아가는 환자들을 위해 그들이 기억하는 과거를 완벽하게 재현한 공간을 제공하는 클리닉을 배경으로 한다. 작년 초 이 소설을 읽으면서 기억 속의 시간(또는 시간 속의 기억)을 공간으로 재현한다는 설정이 기발하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에 국내에 번역, 출간된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의 두 번째 장편소설 <슬픔의 물리학>을 읽으며 기억과 시간, 공간이라는 개념이 이 작가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걸 다시 한번 알 수 있었다. 


<슬픔의 물리학>은 타인의 기억 속에 잠입할 수 있는 초능력을 지닌 소년 '게오르기'를 화자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20세기 후반, 사회주의 끝 무렵의 불가리아에서 태어난 게오르기는 일하느라 바쁜 부모가 못 놀아주는 대신 사준 책을 읽으며 자신에게 이러한 능력이 있다는 걸 남몰래 깨달았다. 소년은 이 능력을 이용해서 1913년생인 할아버지의 다사다난한 어린 시절을 체험하기도 하고, 전쟁의 화마 때문에 아이를 버릴 수밖에 없었던 집안의 비극을 알게 되기도 한다. 전쟁 통에도 피어난 사랑과 그 사랑 때문에 영원히 비밀을 간직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도 알게 된다. 신이라도 믿어야 살 수 있었던 할머니와 그런 할머니 때문에 고통받아야 했던 부모님의 고충도 뒤늦게 이해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 미노타우로스에게 자신을 겹쳐 보면서 그가 스스로 초래하지 않은 이유 때문에 겪어야 했던 차별과 혐오에 눈물짓기도 한다. 


그 책은 그를 괴물로 그려내지만 상관없다. 나는 그 소년 안에 있었고 이야기를 전부 안다. 거기에는 거대한 오해와 중상이, 엄청난 불의가 숨어 있다. 나는 미노타우로스다. 나는 피에 굶주리지 않았다. 청년 일곱 명과 처녀 일곱 명을 먹고 싶지 않다. 내가 왜 갇혀 있는지 모르겠고, 잘못한 것도 없다...... 그리고 나는 어둠이 몹시 두렵다. (88쪽) 


"모든 것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모든 것이 될 수 있었던"(187쪽) 게오르기는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능력이 점차 퇴화하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이제는 잠입도 하지 않고 타인의 이야기를 닥치는 대로 수집한다. 그렇게 수집한 이야기들은 멸망 이후의 세상을 위한 '타임 셸터'가 된다.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의 세 번째 장편소설 제목이기도 한 '타임 셸터'는 이 소설에 이미 소제목으로 나오고, 심지어 <타임 셸터>에 등장하는 시간의 부랑자 가우스틴도 이 소설에 나온다(!!). 게오르기는 본격적으로 기억을 수집하기 전인 1990년대에 가우스틴을 만나 온갖 기발한 사업을 벌이며 그전에도 그 후에도 경험한 적 없는 우정을 나눈다. 나중에 게오르기는 공항에서 우연히 가우스틴의 모습을 보는데, <타임 셸터>에 나오는 가우스틴과 비슷한 걸로 보아 동일 인물(캐릭터)인 듯하다. 


게오르기는 종국에 어떤 깨달음(에피파니)을 얻게 되는데, 그 깨달음이란 "남는 것은 특별한 순간이나 사건이 아니라 바로 '아무것도일어나지않음'"이란 사실이다(386쪽). '아무것도일어나지않음'이란 말 그대로 인생에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무슨 일이 일어나도 결국 일어나지 않은 상태와 같아지고 이는 필연적으로 슬픔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인생뿐 아니라 사회도, 역사도, 신화도. 그러나 슬픔이 남은 자리에는 늘 이야기라는 꽃이 피고, 이 꽃이 새로운 생명을, 사회를, 역사를, 신화를 만든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니 기꺼이 슬퍼하고 부지런히 이야기를 읽고 쓸 것. 이것이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유 - 살아갈 목적 -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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