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릴 때는 사람이든 사물이든 쉽게 반하고, 사랑에 빠지고, 동경했던 것 같은데 나이가 들수록 그런 일이 별로 없다. 반했던 마음이 식고, 사랑 때문에 다치거나 다치게 하거나, 동경이 실망으로 변하는 경험이 쌓이면서 나도 모르게 말랑말랑했던 마음이 단단함을 넘어 딱딱해진 것 같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남은 인생이 긴데. 앞으로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반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살고 싶은데. 이런 생각을 하던 차에 만난 책이 이에니 작가의 산문집 <쉽게 자주 반하는 마음>이다.
이에니 작가는 이제니 시인의 쌍둥이 자매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미술을 전공했고 현재는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 중이다. 미국계 기업에서 비서로 일할 때 만난 외국인 남편과 결혼해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살다가 현재는 앙골라에서 살고 있다. 원가족과 자주 볼 수도 없고 다음엔 어디서 살게 될지 예측하기 힘든 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건,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자주 '반하는 마음' 덕분이다.
언젠가 갑작스러운 겨울 폭풍에 물과 전기가 끊어져 당황했지만, 남편과 침낭에서 자면서 집 안에서 캠핑을 하고 촛불 빛에 그림자 만들기 놀이를 했던 일은 더없이 소중한 추억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외국어를 배워야 하는 건 피곤한 일이지만, 같은 나라에 태어나서 같은 언어로 말하는 사람을 만났다면 누리지 못했을 즐거움도 있다. 어디로 가게 될지 모른다는 건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것. 누구를 만날지 모른다는 건 누구와도 만날 수 있다는 것.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저자에게는 정해진 게 없고 정할 수도 없는 이런 생활이 오히려 기쁘다.
나는 '각자 저마다의 방향과 속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왠지 좋다. 누구도 같은 길에 서 있지 않다는 사실에 어쩐지 안심이 된다. 멈추거나 걷고, 때로는 속도를 높이며 자유롭게 흘러가는 상태. 빛이 이미 우리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문득 자각하게 되는 순간들. 그런 열린 시간들을 자주 만나고 싶다. (7쪽)
모두가 하나의 속도로 살 필요는 없다, 각자의 속도로 살면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나를 반하게 만드는 풍경을 더 많이 마주칠 수 있다. 전보다 누군가에게 반하고 뭔가에 설레는 일이 줄었다면, 혹시 지금 내가 '나의 속도'가 아니라 '남의 속도'로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의심해 보는 건 어떨까. 앞만 보고 갈 때는 앞만 보인다, 나의 속도로 갈 때 비로소 주변이 보인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준 고마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