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처음'은 설렌다. 하물며 그것이 '첫 책'이라면 그 책을 낸 작가에게도, 그 책을 읽는 독자에게도 설렘을 느끼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정기현 작가의 첫 소설집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을 읽는 마음이 그랬다. 정기현 작가를 알게 된 건, 민음사 팟캐스트 '말줄임표' 덕분이다. 민음사에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는 그가 이 팟캐스트의 진행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가 들려주는 책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가 쓴 소설도 궁금해졌다. (공동 진행자인 김화진 소설가도 민음사 편집자 출신이다. 편집자로 일하면서 소설도 쓴다니. 다들 너무 대단하다.)
<빅풋>은 '기은'이 중학교 때 친구 '새미'가 실종되었다는 말을 듣고 새미가 남긴 일기를 읽으며 그동안 몰랐던 새미의 삶을 상상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테니스 선수인 새미는 키는 작지만 발은 유난히 커서 신발장에 있는 신발들도 (당연히) 크다. <발밑의 일>에는 소인(小人)인 '새미'가 임준섭의 집에 숨어들어 한동안 생활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현실에 틈입한 비현실 또는 환상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떠오르기도 했다.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은 휴직 중인 '기은'이 동네 곳곳에 산재해 있는 어떤 낙서를 찾아다니는 이야기이다. (서울 송파구 거여동에 위치한 오카리나 박물관 이야기가 잠깐 나오는데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실재하는 장소다.)
<검은 강에 둥실>도 현실에 틈입한 비현실 또는 환상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름방학을 맞아 시골 할머니 집에서 지내게 된 '새미'가 할아버지 무덤가에서 멧돼지를 발견하면서 벌어지는 일종의 환상 모험담인데 흥미롭다. <마음대로 우는 벽시계>는 고장 난 뻐꾸기시계를 공원에 가져간 기은이 파쿠르를 하는 아이들과 얽히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파쿠르 또한 실재하는 스포츠라고. 모르는 게 참 많다.) <농부의 피>는 길을 걷던 '승주'가 우연히 주인 없는 땅을 발견하고 농사를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승주는 농사를 하면서 자신이 타고난 농부임을 깨닫고 기뻐하지만 어떤 사람의 등장으로 기쁨은 빠르게 식는다.
<시험>은 외고를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던 전교 1등 '승주'가 학교의 '노는 아이들' 무리와 어울리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우등생, 모범생의 일탈 또는 타락은 소설에서 드물지 않은 소재이지만, 이 소설에서 승주가 벌이는 악행은 이유도 없고 대상도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에서 더욱 위험하고 공포스러웠다. <바람 부는 날>은 회사원인 '승주'가 출근길에 있는 공사가 중단된 아파트 단지를 둘러 가지 않고 통과해 가기로 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이 소설도 현실에 틈입한 비현실 또는 환상에 관한 이야기인데, (작가님이 팟캐스트에서 좋아한다고 하신) 판판야(panpanya)의 만화와도 닮았다고 느꼈다.